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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비결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백발의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에 들어오셨다. 휠체어를 힘차게 끄는 미소를 띈 여자분과 함께 였다. 할머니의 차트를 보니 96세 이셨다.
할머니는 명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뭘 먹고 나면, 가슴팍이 답답~한게 체한거 같기도 하고, 안내려가네. 계속 토하기만 하고~"

내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 . .뭐라카노..? "

자칭 노인전문 의사인 나는 할머니의 청각이 떨어진 걸 바로 알아 차리고, 할머니의 귀에 대고 다시 크게 말했다. 그렇게 나의 문진과 진찰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소화 기능이 많이 떨어져 보였고, 나이를 감안하면 간이나 쓸개 질환일 가능성도 있어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할머니에게 검사 계획을 설명하고, 초음파실로 모시고 가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휠체어를 끌고 온 여자분과 할머니는 수화로 뭔가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가 나에게 그녀에 대해 설명해줬다.

"야가 내 딸인데, 말을 못해~ 벌써 예순다섯이야~"

할머니의 딸은 그녀의 나이보다 10살은 어려보였다. 그녀는 심슨 캐릭터가 그려진 모자와 알록달록한 형광색 츄리닝을 입고, 웃는 얼굴로 할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농아인이 내는 찰나의 입소리를 종종 내며, 할머니와 수화를 주고 받았다. 할머니를 극성 맞게 다그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어머니와 소통을 했다.

잠깐이지만 그녀에게 장애로 인한 어두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영락없이 친구같은 엄마와 딸의 모습이었다. 조금 다른 건 두분 다 나이가 아주 많은 모녀라는 것, 그리고 소통의 방식이 소리가 아닌 몸짓이라는 것 뿐.

여차저차 검사를 끝냈고, 다행히 할머니의 상태는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편이었다. 무리없는 할머니의 건강 상태를 알려드렸다.

" 할머님, 초음파로 봐보니까 위, 간, 쓸개도 다 괜찮고, 일시적인 위장 장애 같아요~ 소화 잘~ 되게 하는 약을 처방해드리면 훨씬 좋아지실 거예요~!"

할머니의 가녀린 고막에 최대한 내 목소리가 울리도록 큰 소리를 내보았다. 하지만 위, 간, 쓸개 등등 여러 단어와 긴 문장은 할머니와 딸이 받아 들이기에 무리인 것 같았다. 할머니와 딸은 이해할 수 없는 멍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고민하던 딸은 잽싸게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후 영상통화가 걸리고, 딸은 수화를 하며 전화기속 누구가와 소통을 하더니 나를 비춰줬다.
휴대폰 속에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 내가 물어봤다.

"안녕하세요, 할머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네, 저는 이 가족 담당 수화통역사 예요~"

딸은 원활한 진료를 위해 자신의 가족을 도와주는 수화통역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나는 영상통화 속 통역사에게 할머니의 상태를 알려줬다. 통역사는 딸에게 수화로 그 내용을 전달했다. 문제없는 어머니의 상태에 안심한 딸은 밝은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다시 수화로 나의 말을 전달했다. 이내 할머니의 표정도 밝아졌다.

짧은 영상통화 시간동안, 딸의 팔을 길게 뻗어 보인 휴대폰 화면 속에는 나, 수화통역사, 딸, 할머니가 모두 담겨있었다. 사자대면 영상통화였다. 할머니의 건강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대학병원에서 여러 분야 교수님들이 모여서 치료를 하는 다학제 의료팀 못지 않아 보였다.

할머니의 걷지 못하는 다리는 휠체어를 미는 딸의 손이 대신했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딸의 입과 귀는 가족같아 보였던 수화 통역사가 대신했다. 할머니의 약해진 위장은 나의 의학 지식과 처방이 대신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이 멋진 다학제 팀에 나는 동네의사로서 힘을 보탤 수 있어 모처럼 자랑스러웠다.

"고마워 의사 선상~ 약 먹어보고 또 아프면 올께~"

고마움의 인사를 하는 할머니에 이어, 딸은 간단한 수화를 건네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수화의 정확한 뜻을 나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딸의 마음은 나에게 온전히 전해졌기 때문에.

웃으며 진료실을 나가는 할머니와 딸을 보며 생각했다.
걷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해도 그걸 도와줄 누군가가 있고, 거기서 웃음짓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은 그 어디에도 있는 것일 거라고. 그리고 나는 행복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마주했을 농아라는 딸의 운명. 그 운명에 마주하며 짓는 그녀의 미소는 Amor fati 를 외치는 세기의 철학자의 미소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짓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기꺼이 살아나가는 딸과 그녀를 묵묵히 돕는 사람들, 그런 선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할머니의 휠체어를 다시 밀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96세 할머니의 장수의 비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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