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넘겨보던 이메일 더미 속에서 10년 전, 학부의 한 교양과목에서 리포트로 작성했던
'10년 후 나에게 편지 쓰기' 내용을 발견했다. 스물다섯의김진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고 했더니 이랬구나.
[10년 후 나에게]
안녕? 10년 후 김진희.
10년 후면 너는 나이를 서른다섯이나 먹었겠다.세상에...
나는 네가 10년 뒤에는 영어교육분야에서 굵직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스스로가 자부심을 느낄 만큼 멋진 일을 해내고 있을 것 같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네가 살고 있을 그 10년 후를 위해서 내 시간 전부를 공부에 쏟고 있거든. 이 시간이 헛되어서는 안 되지.
서른다섯이면 결혼도 했겠지? 지금이야 결혼 따위 관심 없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하게 되지 않을까? 어떤 남편을 만났을까?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고, 똑똑하고, 센스가 넘치나? 다른 건 몰라도 널 뛰는 너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주면서도 자신의 감정에는 큰 요동이 없는 그런 평온한 사람을 만나면 좋겠어.
돈도 많이 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대체 사람은 얼마를 벌어야 많이 버는 걸까? 지금 생각엔 무언가를 구매할 때 금액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큰 스트레스 없이 가질 수 있는 딱 그 정도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엇보다 10년 뒤의 너는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람이면 좋겠다. 성향이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가면 쓰고 긍정적인 척하지 말고, 진짜로 긍정적인 사람. 될까?
지금의 나에게 미래의 네가 고마워할 수 있도록 나는 여기서 최선을 다할게.
10년 뒤의 너도, 20년 뒤의 너에게 고맙다는 소리 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해. 이런 편지는 좀 오글거리지만 나는 오늘도 수고했고, 먼 미래에 이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 볼 너도 오늘 하루 수고했어. 원한 적은 없다만, 태어나버렸으니 열심히 살아보자.
피식피식 웃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도 참 나구나.
그래 정말 스물다섯의 김진희는 '공부만' 하고 살았었지. 이를 악물고 장밋빛 미래를 그리면서.
지금이야 뒷방 늙은이 노릇하고 있지만 그 시절의 나는 나름 총명했다.
서른다섯이나 먹었... 겠구나라고 했지만 난 이미 마흔이 되었고. (세상에...)
영어교육분야에서 (굵직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잘 자리 잡고 살고 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서른다섯에 결혼을 하지는 못했지만 2023년 9월, 39살이 되는 해에 결혼을 했고
다행히 남편은 네가 상상했던 장점을 가진 사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야 많이 버는 거냐는 25살의 내가 내린 정의가 많이 버는 거라면
그렇다. 많이 벌고 있다. 참 다행이다.
행복했으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 나는 40년째 한결같이 행복과 긍정을 부르짖고 있구나. 나도 참 징하다.
인생 그냥 사는 거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별로 없고, 긍정적인 건 뭐.. 때에 따라 다르다.
10년 전 네 말대로 그냥 태어났으니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것뿐.
10년 전 나의 예상대로 나는 10년 전 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청춘을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희생(?) 한 결과로 나는 무지막지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요즘 나는 현재 기준 10년 뒤의 나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지 못 들을지 잘 모르겠다.
10년 전만큼 내가 현재 치열하게 살고 있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다.
체력도 떨어지고, 총기도 사라졌고, 나의 욕심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지금 나에겐 너무도 많다.
그래도 오늘 하루 수고한 것은 맞다. 수고했다. 나 새끼.
10년 후 나는 쉰 살이 되어있을 텐데, 이 편지를 읽은 김에 10년 후 나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써본다. 10년 전처럼 길게 쓰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럴 에너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