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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Jul 03. 2024

장마

여름에 장마는 당연한 것

장마 때문에 난리다. 뉴스에서는 폭우를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고 인명피해가 없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주문을 외듯이 세뇌시키고 있다.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 시스템에서 대비해야 할 일들을 모두 시민들에게만 떠안기는 느낌이라 날씨만큼이나 기분이 찝찝하다.


장마가 올 한 해만 겪는 것도 아니고 큰 피해가 예상되는 태풍이 오는 것도 아닌데 뉴스에서 비를 조심하라 떠들어 대니 사람들도 그에 동요하는 분위기다.

밤거리에 사람이 없다. 마치 비를 맞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길에 나서질 않는다. 고요한 밤거리를 보며 우리가 언제부터 날씨 따위에 주춤거렸나 싶기도 하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올 것이란 예상과 달리 오늘은 비가 그쳤다. 몸이 조금 찌뿌둥해서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최근 조금 무리하게 뛰어서인지 왼쪽 발목이 좋지 않았다. 뛰는 것 대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에 한 시간 정도 산책하고 있는 안양천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 보였다. 비가 잠시 그친 것이니 때를 놓치기 싫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을 것.


걸을 때는 뉴스를 듣거나 음악을 듣는 편인데 최근에는 영어 리스닝을 다시 하고 있다. 가게에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오면 영어로 대화할 때가 있는데 종종 메뉴 얘기 말고 한 단계 깊은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마침 가게가 한가해서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기쁘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유려하게 영어를 하지 못해서다. 대충 단어의 나열로 통해 뜻은 통하겠지만 대화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못된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와중에 가벼운 농담 정도는 쉽게 던질 수 있어야만 좋은 대화라고 생각하는 나는 여전히 영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영어가 들리면 어떤 기분일까? 웃긴 건 아주 가끔 영어로 꿈을 꾼다는 것이다. 지금 내 실력으론 어이없는 일이다.


산책이 거의 끝날 무렵 나란히 걷고 있는 할머니 두 분이 보였다. 허리도 꼿꼿하고 옷차림도 담백해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비를 맞아 녹음이 더욱 짙어진 나무 사이로, 짙은 갈색 데크 위를 걷고 있는 백발 노인의 뒷모습은 멀리서도 사진을 찍고 싶을만큼 평화로워 보였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곧 나의 평화가 깨졌다.

할머니 중 한 분이 어디서 주운지 모르겠는 긴 나뭇가지를 짚고 걷다가 송충이만 보이면 짓이기는 것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송충이가 무슨 죄라고 가만히 있는 송충이를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마치 전멸을 시키겠다는 듯 나뭇가지로 꾹꾹 눌러가며 걷는 것을 보며 나는 몹시 불쾌해져 버렸다.

할머니들을 지나쳐 걸었다. 송충이가 줄지어 있는 게 보였다. 이제 곧 할머니에게 짓이겨질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송충이를 보았다. 오늘따라 꼬물거리는 게 더 느려터졌다. 손으로 잡지는 못하고 후후 불다가 살짝 튕겨냈다. 자갈 쪽으로 튕겨냈기 때문에 일단 할머니 눈에는 띄지 않았을 것이다.


-걔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다 짓이기세요?


따지고 싶었으나 괜히 따졌다간 나뭇가지가 내 얼굴로 휘갈겨질 것 같아 관뒀다. 백발의 할머니라고 옷을 담백하게 입었다고 허리가 꼿꼿하다고 해서 다 인자한 것은 아니니까.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이어폰을 다시 끼고 뉴스를 들었다. 서울시청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사고의 피해자가 우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더 두렵고 화나게 만드는 것 같다. 급발진이다 아니다 말이 많고 고령 운전이 문제다 아니다 말이 많다.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운전자의 과실로 몰면서 운전자와 동승자를 악마화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이 닥치면 사람들은 일단 미워할 사람부터 찾는다. 그리고 분노를 집중시킨다.

당연히 안타까운 일이다. 나 자신, 내 가족, 내 친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봐야 하는 일이다. 어떤 미친 사람이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역주행으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전속력으로 달리겠는가?

사고가 난 지점은 개인적으로 자주 걷는 길이라 남일 같지 않다. 마침 그날도 아내와 함께 종로 쪽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동네에서 식사를 했다. 피해자분들의 사연을 들으니 더 안타깝다. 축하할 일로 만난 자리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당장의 이슈 몰이가 아니고 이 사고는 언론에서 꾸준하게 따라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피해자의 가족들도 국민들도 납득이 될 것이다.


이번에 안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 급발진이 법적으로 인정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 사고 운전자 역시 급발진을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전 국민적인 관심 안에 있으니 더 그럴 것 같기도 하다.


흔한 표현이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렸다. 그 피해자가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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