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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Nov 19. 2024

때를 밀었다

-그때의 아버지는 어른이었고 나는 아직 모르겠다.



거실로 나와보니 확실히 추웠다.

나가기 직전에 씻는 것이 좋지만 그냥 씻기로 했다. 조금 일찍 나가면 될 일이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니 냉기가 돌았다. 뜨거운 물을 한동안 틀어 흘려보냈다. 금세 욕실 안이 증기로 가득해졌다. 온기가 돌았다.

수전 손잡이를 조정해서 씻기 적당한 온도로 맞췄다. 머리부터 물을 적시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정수리에 바로 닿으면 탈모의 진행이 빨라진다고 하니 고개를 젖혀 이마부터 적셨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어깨에 물이 닿도록 반발짝 앞으로 나갔다. 어깨가 물렁거리는 느낌이 들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어깨를 만지작 거리다가 손톱으로 긁었다. 손톱에 때가 꼈다.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 때를 밀기로 했다. 수전을 돌려 물을 더욱 뜨겁게 맞았다.


샤워기 바로 옆에 있는 선반 맨 위층에서 노란색 이태리타월을 꺼냈다. 물을 충분히 적신 후, 어깨부터 때를 밀기 시작했다. 목 뒤, 팔꿈치, 겨드랑이, 옆구리, 허벅지, 종아리, 복숭아뼈, 발 뒤꿈치 순으로 때를 밀었다. 평소보다 힘을 줘서 밀다 보니 중간부터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했다. 내 몸 하나 미는데도 이렇게 힘이 들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가만히 서서 쉬고 있었다. 샤워기로 따뜻한 물을 맞는 건 너무 좋아서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는 내가 목욕하고 나오면 뿌옇게 새어 나오는 수증기를 보며 신선이 등장하셨다고 어서 빨리 로또번호 좀 알려달라고 합장을 하고 놀리듯 얘기한다.


몸이 나른해졌다. 고개를 숙이며 물을 맞고 있다 보니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때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목욕탕에서 어린 나와 동생의 때를 밀어주고 혼자 구석에 앉아 자신의 때를 밀었던 아버지. 자신의 몸을 밀다가 지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던 그 모습을 나는 동생과 냉탕에서 놀다가 보게 됐다.


동생을 냉탕에 두고 나와 나는 아버지의 등을 밀었다. 힘이 없었으니 아무리 세게 밀어도  때가 잘 나오질 않았다. 아버지처럼 때를 잘 밀어주고 싶었는데 맘처럼 안 돼서 속상했다.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하다. 아버지는 어른이었고 나는 가끔 내가 어른인가 싶다.


아버지는 늦게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와 동생을 키웠고. 맘처럼 되지 않은 것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나는 그게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한동안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아픈 후로 마음속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원망을 더 이상 꺼내 보지 않는다. 상대가 너무 연약해져서 싸울 의지가 생기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이제 아버지와 말다툼 조차 하고 싶지 않다. 당연히 원망도 하고 싶지 않다.


그의 마지막이 애처로울 뿐이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았다. 아내가 낮잠을 자는 듯해 드라이기를 쓰지 않고 머리를 대충 털었다. 그때의 아버지는 수건 끝을 양손으로 잡아 이소룡이 쌍절곤을 돌리듯 현란한 손짓으로 머리를 털어 주곤 했다.


평소보다 오래 샤워를 했다. 때도 밀었다. 그리고 그때의 피곤해 보였던 아버지도 잠시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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