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이 지나서 소환된 TV쇼의 한 장면
Bobby Banas는 뮤지컬, 영화에 출연한 댄서이자 안무가이다. 그의 몸은 새털처럼 가벼웠고 그의 동작은 검무와 같은 날카로움이 서려있었다. 무엇보다 춤을 출 때 그는 완전히 춤에 몰입되어 자아가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무당이나 샤먼이 무엇인가에 빙의하는 순간을 연상시킨다.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Bobby Banas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클래식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Bobby Banas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그가 출연했던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1961년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에서 'Jets' 갱단의 멤버 중 한 명으로 출연했으며, 1964년 디즈니 영화 메리 포핀스(Mary Poppins)에서는 주인공 딕 반 다이크(Dick Van Dyke)와 함께 지붕 위에서 춤을 추는 굴뚝 청소부로 등장했다. 제법 알려진 영화 속 장면을 꼽자면 Let's make Love(1960)에서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와의 키스신이 있다. 물론 바비로 인해서가 아니라 마릴린 몬로라는 전설적인 배우의 키스신이니 이 장면만은 사진으로 퍼져서 그나마 몇 번 본 적이 있는 이미지이다.
Let's make love (1960)에서 마릴린 몬로와의 키스 신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동시대의 뜨거운 이슈를 알려주거나, 내가 즐겨 찾는 관심사와 연관된 것들이 유튜브의 추천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즐겨 찾아보았던 영상과는 상관없는 뜬금없는 영상이 그것도 여러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추천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우주에서 길을 잃은 소행성의 그 파편이 지구의 하늘로 우수수 떨어지는 별똥별 쇼와 같다.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보았더니 그게 나에게 보였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전산망 속에 떠다니는 수백만개의 영상중 하나를 나에게 추천하는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Bobby Banas가 출연한 1964년 The Judy Garland Show는 앞에서 언급했던 별똥별 쇼와 비슷한 2012년의 유튜브 사고 중 하나이다.
TV show 초창기부터 유명 영화배우나 가수가 호스트가 되어 TV쇼를 이끌었었다. 주디 갈란드, 딘 마틴 등의 TV쇼가 유명했다. 심지어 1970, 8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팻 분, 폴 앵카 등이 호스트로 진행하는 크리스마스 특집 쇼 틀어주는 것이 방송국의 관례일 정도였다. 오늘날 이러한 스탠더드 팝의 계보를 이어 크리스마스 쇼를 진행하는 가수는 캐나다의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é) 정도가 유일한 듯하다. 마이클 부블레는 폴 앵카를 스승으로 모셨던 배경이 있다. - 아, 죄송합니다. 다시 바비 바나스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독자분들께는 앞으로도 이렇게 배경을 설명하다 샛길로 빠지는 일이 잦아질 듯하여 거듭 미안합니다. 그리고 적응하셔야 합니다. ^ ^
West Side Story (1961)중 갱들의 댄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블루그레이 티셔츠가 Bobby Banas
1964년 Judy Garland Show에서 배우 Peter Lawford로 보이는 남자 진행자는 Shirley Ellis가 부른 The Nitty Gritty를 소개한다. 화면에서 세 명의 진행자 중 오른쪽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주디 갈란드다.
노래에 맞춰서 여섯 명의 댄서들이 남, 여 커플을 이뤄서 춤을 춘다. 그들은 졸업식 프롬(Prome)에 참석한 젊은이들 분위기로 남자 댄서들은 턱시도에 옥스퍼드 구드를 신었고, 여성 댄서들은 짧은 기장의 파티 드레스를 입었다.
The Nitty Gritty는 틴 팬 앨리(Tin Pan Alley)가 저물어가고 로큰롤이 기성세대의 음악에 시비를 걸었던 1960년대의 리듬감이 돋보이는 팝이다. 이 무대의 춤은 Bobby Banas가 안무를 짰다. 이들이 추는 춤은 탭 댄스나 찰스턴도 아니고, 자이브나 맘보도 아닌 것이. 앞에서 언급한 춤들을 현대 무용으로 버무린 듯 한 날것의 춤이었다. 카메라는 사뿐사뿐 움직이지만 광기가 서려있는 바비 바나스의 옥스퍼드 구드를 쫓아간다. 그는 곡의 마디가 진행될수록 점점 자신의 춤에 빠져서 고개를 흔들어댄다. 춤에 100% 몰입한 그의 모습은 마치 무협지에서 말하는 물아일체의 경지와 비슷하다. 그야말로 자신의 춤에 의식을 놓아버린 채 빠져있다. 다른 다섯 명의 댄서들도 나름 춤에는 일가견이 있는 댄서들일 텐데, 바비 바나스의 몰입감이 압도적이다. 이렇게 팔을 움직이고 저렇게 골반을 흔든다 하는 레벨이 아니다. 이 순간 바비는 댄서라기보다 제삼자의 혼에 빙의한 샤먼과 비슷하다.
영상을 보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바비의 춤에 빠져서 나도 모르게 십수 번 이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무엇이 나에게 울림을 주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 영상에는 보기 드물게 세 세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노래를 소개하는 사회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중년을 지난 배우들이며, 춤을 추는 댄서들은 진행자들이 보기에 무명의 젊은 세대의 댄서이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한 세대를 앞서 나가는 춤사위가 나와서 세대 간의 혼란을 더한다. Bobby의 춤은 여섯 명의 댄서에게 주어진 공간을 뒤섞어 버린다. 그의 동작은 마치 큰 보울 안에서 휘핑크림을 만드는 거품기(whisk) 같다. Bobby의 춤이 무대의 공기를 빨아들여서 마구 뒤섞고 있다. 기성세대는 어쩌면 무대 위 다른 댄서들에게 민폐처럼 보이는 그의 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러한 세대 간의 긴장감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춤에 빠져있으니 건드리지 마세요 하는 바비 바나스의 에너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이 장면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근대 예술(modern art)과 현대 예술(contemporary art)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물론 필자 혼자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주장하는거다.)
이 쇼를 조사해 보니 바비 바나스가 등장 한 해가 1963년이라는 자료도 있고 64년이라는 자료도 있었다. 여하튼 이 쇼가 방송되고 48년이 지난 2012년 유튜브에 Shirley Ellis가 아닌 바비 바나스의 The Nitty Gritty로 사람들의 알고리즘에 나타났다. 이 영상은 클래식 영화, 무용, 옛 뮤지컬, 60년대 팝을 찾아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었고 여러 학교의 무용과 졸업식과 춤 동호회의 발표회장에서 열광적으로 The Nitty Gritty의 커버 무대를 올리기에 이른다. Bobby Banas는 2024년 7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튜브에서 The Nitty Gritty를 검색해 보면 주디 갈란드 쇼의 일부를 편집 한 여러 개의 영상들이 있다.
그중 가장 조회수가 높은 두 개의 영상을 추천드린다. 하나는 세 명의 사회자가 곡 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영상인데, 아쉽게도 이 영상에서는 노래의 2절 부분이 편집되어 사라져 있다. 이 영상은 2025년 4월 현재 2039만의 조회수를 보여준다.
독자분들께서는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 주시길 바란다.
https://youtu.be/8S3Yt-NxY0E?si=CxGsZxIEAxiIEMfs
다른 하나는 사회자가 등장하지 않지만 노래 시작부터 거의 완곡을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서 바비의 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다만 곡의 마지막 피날레 부분이 편집되어 빠져 있다. 이 영상의 유튜브 조회수는 622만 회이다.
https://youtu.be/P2v8IgJdsm4?si=Qv6Wy3tRepRVigbL
사족을 달자면, 필자는 이 쇼의 주인장인 Judy Galand에 대해서도 정말 할 말이 많다. 나는 사춘기를 앓던 열두 살에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처음 보았으며, 양갈래 머리를 한 주인공 소녀에게 단번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첫사랑과 비슷한 할리우드 스타였다. 그 영화가 나의 어린 시절 기준에도 이미 고고학 박물관 급인 테크니컬러(Technicolor)로 제작된 1939년 영화임을 안 것은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 사춘기 소년에게는 제법 충격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