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Robeson과 William War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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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에서 심각한 기억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발행했던 글을 발행 두 시간 후에 읽어보다가 아이쿠야 나의 기억이 어디에서부터 뒤엉킨 것일까 하는 중대한 오류를 깨달았습니다. 여러 번 퇴고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기억의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다섯 분이 그 글을 읽으셨네요. 일단 발행한 글은 다시 서랍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글 삭제를 했습니다. 기존에 쓴 글의 상당한 부분을 들어내고 수정을 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유튜브의 세상은 소리로만 듣던 CD의 공연의 실황을 담은 영상이 있는지 찾아본다거나,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옛날 자료들을 찾아보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과도 같았다. 필자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릴 적 TV로 보았던 나가이 고(永井豪)의 애니메이션이라던가 주말의 명화를 보다가 망치로 때려 맞은 듯 강한 울림을 주었던 클래식 영화의 한 장면들도 어느덧 흐릿 흐릿한 파편들이 되어버렸다.
유튜브를 통해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유튜브가 없었을 때라면 볼 수 없었던, 예를 들어 TV에서 나와 비슷한 취향의 기획자가 기나긴 기획 회의 끝에 가까스로 방영하는 [신년 특집 할리우드 클래식 뮤지컬 10선] 이라던가, [스윙 재즈의 역사]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았다면 절대 볼 수 없었던 장면들 말이다. 이제는 옛날 영화의 장면들을 유튜브에 접속해서 약간 수고스러운 검색 만으로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유튜브는 문명이 가져다준 선물 보따리였다. 기억 속에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작은 조각들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는 것이 나만의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구글맵에서 '설마 리히텐쉬타인의 시골길 로드뷰도 있겠어? 한 번 찾아보자!'와 비슷한 레벨의 도전 의식을 심어주었다. 점점 더 오래된 영상들을 찾아보게 된 것이다. 구글맵에서 그런 탐험을 해 본 적이 없다고요? 아니, 그럴 수가!
필자가 유튜브에서 도전 의식을 고취되어 검색했던 주제를 살펴보자면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가 가장 예쁘게 나왔던 영화 속 장면을 찾아보자.'라든가, '프루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가 지휘하는 모든 영상을 찾아보자.'라든가, 어린 시절의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였던 원더우먼(린다 카터 Lynda Carter 사랑해요!)이 지금 보아도 그렇게 보이는지 찾아보자.' 등의 도전이었다. 물론 린다 카터는 중년이 된 내가 다시 봐도 아름답다. 그녀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깊고 신비로운 회색의 눈을 가지고 있다.
유튜브에서 탐험! 검색 도전을 할 때마다 '이 정도는 유튜브에 있겠지. 아마 있을 거야.' 하는 생각으로 찾게 되는 영상이 있고, '설마 이런 영상도 있겠어? 설마.......' 하면서 반은 포기한 상태로 검색을 하는 영상도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영상은 후자의 경우였는데, 찾고자 하는 영상이 1936년 상영된 흑백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1936년이라면 아직 괴뢰국인 만주국이 있던 시기이며 이상의 '날개'가 발표된 해이다. 유튜브에 접속해서 '이런 것도 있겠어?' '이런 것까지 있겠어?' 하면서 검색의 난이도를 높여가던 차에, 1936년 흑백 필름으로 제작된 뮤지컬이 있겠어? 하면서 찾아보게 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있었습니다.
유튜브 만세.
내가 뮤지컬 Showboat에 나오는 여러 곡 중에서 Ol'man River의 1936년판을 검색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들려주셨었던 Showbat의 51년판 사운드 트랙 LP레코드에 대한 추억에서 시작되었다.
192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한 Showboat는 뮤지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보드빌 쇼(vaudeville)라 불리던 코미디, 춤, 노래가 이어지는 버라이어티 쇼에서 탈피해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된 최초의 뮤지컬 극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뮤지컬의 시조새가 되는 뮤지컬이다. 곡은 제롬 컨(Jerome Kern 1885-1945)이 작곡을 했고, 가사와 대본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Oscar Hammerstein II)가 맡았다.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는 후에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모든 곡의 가사를 쓰게 된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Showboat는 세 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유성영화의 초창기인 1929년판은 일부 장면은 무성영화였을 정도로 무대 위의 뮤지컬을 영화화하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로부터 몇 해가 지난 1936년에 드디어 뮤지컬극을 온전히 영화로 옮긴 흑백 뮤지컬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컬러 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1951년 컬러판으로 세 번째 버전이 제작된다.
1951년 컬러판 쇼 보트는 영화 '7인의 신부'에서 주인공을 맡게 되는 하워드 킬(Howard Keel)과 세기의 미녀 배우 에바 가드너(Ava Gardner 사랑해요!)가 주연을 맡았으니 MGM영화사가 이 영화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Showboat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는 미시시피강에서 하루하루 고되게 노동을 하면서 버티는 흑인 노동자의 노래 Ol'man River이다. 1936년 흑백 필름으로 이 영화가 개봉되자 Ol'man River를 깊은 저음으로 불렀던 흑인 베이스 바리톤 폴 롭슨(Paul Robeson 1898-1976)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고, 그의 노래로 인해서 이 영화가 최고 중 하나가 되었다는 신문 논평까지 등장한다.
그가 부른 Ol'man River는 이 뮤지컬의 대표곡이 되었고, 여러 베이스 바리톤들이 무대에서 즐겨 부르는 곡이 되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볼 때, 흑인 예술가에 대한 이 정도의 찬사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급기야 1936년 영화 쇼보트의 성공에 힘입어서, 전설적인 베이스 바리톤 표도르 셜리아핀(Fyodor Shalyapin 1873-1938)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독일에서는 한스 호터(Hans Hotter)가, 미국과 영국에서는 폴 롭슨이 거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들려주는 저음의 깊은 울림에 대한 찬사에 대찬사가 쏟아졌다.
이 정도로 흑인 예술가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인데. 오늘날 전설로 추앙받는 마일즈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이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는 시기가 1950년대 후반이었으니 폴 롭슨은 이들보다 20여 년이 앞선 경우다. 1930년대 당시에 백인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흑인 예술가는 스윙 재즈 밴드를 이끌던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색소폰 연주자 콜맨 호킨스와 트럼펫의 루이 암스트롱 정도였다. 가스펠 음악의 마하리아 잭슨(Mahalia Jackson )이나 미국 대중음악을 주름잡았던 냇 킹 콜(Nat King Cole) 조차 아직 20대의 풋풋했던 시절이었니 말이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폴 롭슨에 대한 찬사는 흑인들 사이에서는 폴 롭슨에 대한 추앙으로 이어진다. 요즘 말로 하면 흑인 형님들의 국뽕을 차오르게 하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이 무엇이었는가. 고되고 고된 노동 속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버텨나가고, 밤에는 술에 취해서 거리에 쓰러졌다가 구치소에 갇히는 흑인 노동자의 노래 Ol'man River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 곡은 흑인의 저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고 폴 롭슨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Ol'man River와 함께 그를 흑인 인권과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러한 상징성이 곧바로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화사와 음반사들은 더욱 자극적인 문구로 그를 포장하기에 바빴다.
유튜브나 케이블 TV가 없던 시절, 한 편의 영화가 가지는 힘은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대중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별처럼 우러러보았고, 그중에 폴 롭슨이 있었다. 당시 흑인이라면 가벼운 광대와 같은 이미지를 어필해야 성공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흑인이 예술가인양 무게를 잡으면 맥주병이 날아들었다. 루이 암스트롱조차 그렇게 백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 안에서만 활동을 이어갔다.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은 폴 롭슨처럼 진중한 이미지로 백인들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화라는 무기를 장착한 폴 롭슨은 예외였다. 그는 대중문화를 넘어서 미국의 정치사와 사회 운동에도 기록될 만한 영향을 끼쳤다. 예술이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경우였다. 다만 흑인 사회가 폴 롭슨에게 떠맡긴 인권운동의 상징성과 부담감이 한 개인의 삶에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미국에서 홀로 성공과 명예를 누리는 현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Ol'man River로 돌아오자. 이 곡의 가사는 고된 노동으로 이어진 고단한 삶에 대한 체념이다.
그런데 폴 롭슨 본인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흥행을 노린 뮤지컬 제작사의 의도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체념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원곡의 가사가 저항의 느낌이 들도록 개사가 이루어졌다.
"Ol' Man River" –원래 가사와 Robeson 수정 가사 비교
원래 가사 (1927) "Niggers all work on de Mississippi"
Robeson 수정 버전 "Colored folks work on de Mississippi" (또는 “Here we all work on de Mississippi”)
원래 가사 (1927) "Tote dat barge! / Lift dat bale! / Git a little drunk / An’ you land in jail."
Robeson 수정 버전 "Tote dat barge! / Lift dat bale! / You show a little grit / And you lands in jail."
원래 가사 (1927) "Ah gits weary / An’ sick of tryin’ / Ah’m tired of livin’ / An’ skeered of dyin’"
Robeson 수정 버전 "But I keeps laffin’ / Instead of cryin’ / I must keep fightin’ / Until I’m dyin’"
“Niggers”라는 표현은 모욕적 언어이기 때문에 Robeson은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부터 이를 "colored folks" 등으로 바꿔서 불렀다."I’m tired of livin’ / and scared of dyin' " "나는 사는 것에 지쳤어 / 죽는 것이 두려웠어"처럼 삶을 체념하는듯한 가사는 "I must keep fightin’ / until I’m dyin’" "나는 계속 싸워야 해 / 죽을 때까지"로 바꿔서 흑인의 저항 정신을 담았다.
특히 "Tote dat barge! / Lift dat bale! / Git a little drunk / An’ you land in jail." "짐을 싣고 가! / 짐을 들어 올려! / 술에 취하면 / 감옥에 가는 거야"하는 가사를 "You show a little grit and you lands in jail” "약간의 투지를 보이면 감옥에 가게 됩니다" 하는 가사로 바꾸면서 인종 차별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Ol'man River는 폴 롭슨의 노력과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곡이 되었다.
여러 독자분들은 이 즈음에서 폴 롭슨의 목소리에 대해 궁금하실 것이다. 나에게 이 글의 첫 문장을 적는 순간부터 가장 어려웠던 점은 1936년 흑백판을 먼저 보여드릴 것인가, 1951년 컬러판을 먼저 보여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마도 내 아이들에게 스타워즈 에피소드 4부터 보여줄 것인가 에피소드 1부터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다음으로 어려운 문제 같다. (저는 아이들에게 1977년 에피소드 4부터 보여주었습니다.)
고민 끝에 1936년 흑백판을 먼저 소개해 드리기로 했다. 1936년판은 영화적인 기법이나 폴 롭슨의 창법이 51년판에 비해 소박하고 단출하다. 하지만 노래를 부를 때의 폴 롭슨의 눈을 보고 있자면 왠지 하루 종일 고되게 밭 일을 하고 외양간으로 돌아온 누런 소의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연상된다. 그의 목소리와 눈동자에 빠져든다. 삶의 아픔이 공감되면서 가슴이 저려온다.
https://youtu.be/df4VdyGIqJ8?si=JWgi-sbAMWL9_Nxy
뮤지컬 영화가 다시 리메이크되는 경우는 정말 드믈다. 뮤지컬 영화상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사운드 오브 뮤직조차도 아직까지 리메이크에 대한 엄두를 못 내고 있다. 2018년 개봉한 메리 포핀스 리턴의 경우 1964년작 메리 포핀스의 속편이다. 어떤 뮤지컬이 히트를 하고 그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리메이크작을 만든다는 결정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MGM 스튜디오는 자기네 회사가 계약하고 있던 스타들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클라크 게이블을 위시해서 셀 수 없는 스타들이 MGM 스튜디오를 위해 일을 했다. MGM은 남자 주연 베우로 하워드 킬을, 여자 주연 배우로는 사랑스러운 뮤지컬 배우 캐스린 그레이슨 (Kathryn Grayson)을 선택했으며. 출연 배우들 중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에바 가드너(Ava Gardner)를 투입하여 진용을 완성했다. 캐스린 그레이슨과 에바 가드너는 우아하면서도 묘하게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아마도 감독의 취향이 이런 쪽이었나 싶다.
MGM과 감독 조지 시드니 (George Sidney)에는 폴 롭슨으로 인해서 뮤지컬의 상징이 된 곡 Ol'man River를 부를 성악가를 찾아야 했다. 폴 롭슨의 상징성은 부담스러운 존재이기에 보다 부드럽고 백인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곡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이때 군대를 제대해고 콘서트에서 좋은 평을 얻고 있었던 신예 바리톤 윌리엄 워필드(William Warfield 1920–2002)가 제작자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윌리엄 바필드로 불리기도 했다. 윌리엄 바필드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나이가 지긋하신 전후세대이실 듯하다. 폴 롭슨의 음색이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면 윌리엄 워필드의 음색은 보다 부드럽고 감정이 절제되었다. 그러나 윌리엄 워필드의 해석이 곡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 모자람이 없었다. 젊은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감독 조지 시드니는 이 젊은 성악가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노래 부를 때에 카메라는 온전히 윌리엄 워필드만을 비추고 있다. 가사를 표현하는 어떠한 장치도 배재한 채 아주 세밀하게 움직임이 계산된 카메라가 윌리엄 워필드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거북이걸음의 트랙 인(Track in) 카메라 워킹은 절제된 세련미를 갖춘 감독에게서 보이는 기법이다. 홀로 서 있는 윌리엄 워필드에게 아주 느리게 다가가는 카메라는 그의 감정이 고저 되는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면 어느덧 클로즈 샷으로 그의 감정을 담아낸다.
윌리엄 워필드 역시 Nigar라는 가사를 There's ol'man으로 바꿔서 불렀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사는 원곡에 충실하다. And you land in jail을 부를 때 위필드는 jail의 음을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끌어내린다. 나는 이 부분을 정말 사랑한다. 윌리엄 워필드가 이 노래를 마칠 때마다 낮은 탄성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Bravo!
https://youtu.be/pSzYRo9j7YM?si=1NxKIQG-Is__6DnI
Ol'man River를 다시 히트시킨 윌리엄 워필드는, 이후 조지 거쉬인의 뮤지컬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에서 Porgy역을 맡아 전 세계 투어 공연에 참가하게 된다. 폴 롭슨 이후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오페라 씬은 흑인 성악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윌리엄 워필드는 상대역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Leontyne Price)와 함께 흑인 성악가가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개척자의 길을 가게 된다.
윌리엄 워필드와 레온타인 프라이스는 포기와 베스의 공연 이후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 글의 커버 이미지로 사용된 폴 롭슨의 포트레잇(Portrait)에 대해 언급을 해야겠다. 2009년 예술의 전당에서 인물 사진의 대가인 유세프 카슈(Yousef Karsh)의 초상사진(Portrait) 전시가 열렸다. 당시 예술의 전당에서는 카슈의 대표 초상 사진 중 하나인 오드리 헵번과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홍보하면서 티켓 판매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초상 사진전시회는 다른 전시회와는 달리 미적인 안목은 부족하더라도 잡학적인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건지는 게 많다. 이 유세프 카슈의 전시가 그랬는데 전시회에서 나를 사로잡은 사진은 예상하지 못했던 폴 롭슨의 초상사진이었다. 고개를 돌려 매섭게 노려보는 폴 롭슨의 눈동자에서 Ol'man River가 압축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초상 사진이라는 장르에서 어느 정도 레벨 이상의 내공을 지닌 작가들은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피사체가 지닌 특징 뿐 아니라 성격까지 드러내는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19세기 사진가 나다르(Nadar)가 찍은 화가 밀레(Jean-François Millet), 아널드 뉴먼(Arnold Newman)이 찍은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주명덕이 찍은 소설가 최인호, 유세프 카슈가 찍은 폴 롭슨의 사진 등이 그러한 예가 될 수 있겠다.
Yousef Karsh 가 찍은 Paul Robeson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