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날개를 단 스카이섬(Isle of Skye)
"빈방 있나요?”
‘No Vacancy’ 등이 켜져 있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두드렸다. 빈방이 없다고 하면 옆집으로, 다시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B&B와 호텔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우산을 들고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 언덕길을 올라왔더니 후덥지근했다.
좁은 버스터미널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30분 이상 찾아다녔는데도 빈방을 찾지 못했다. ‘아무 데라도 숙소를 예약하고 올걸’ 후회가 밀려왔다.
아침 일찍 에딘버러(Edinburgh)를 떠난 기차는 정오경에 인버네스(Inverness)에 도착했다. 괴물 네시의 전설이 살아 있는 도시 인버네스에 간 김에 네스호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스카이섬(Isle of Skye)을 여유 있게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장 선배 H가 꼭 가보라고 추천해서 알게 된 섬이다. 이끼로 뒤덮인 계곡, 황량한 초지, 주름치마를 닮은 해안절벽을 만날 수 있는 스카이 섬. 이름만으로도 대자연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스카이(Skye)’가 하늘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날개‘를 의미했다. 섬의 모양이 새의 날개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샌드위치를 사서 카일 오브 로칼시(Kyle of Lochalsh) 행 기차에 올라탔다. 인버네스에 올 때와는 달리 길이가 네 칸밖에 안 되는 낡은 기차였고, 승객도 많지 않았다. 기차는 푸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와 소떼, 운무에 싸인 초원길을 지나 두 시간 반 뒤 종점인 카일오브로칼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스카이섬의 포트리(Portree)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스카이브릿지를 넘어 스카이섬으로 들어간 버스는 카일리킨, 브로드포드를 지나 한 시간 후 예쁜 항구도시 포트리(Portlee)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버스터미널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혼자 숙소를 알아보러 나왔다. 여행할 때는 최소한 하루 전에라도 숙소를 예약하고 떠나는데, 스카이섬은 인터넷에 정보가 많지 않았고, 스코틀랜드 서북단 구석에 위치한 섬이라 여행객이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직접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숙소를 잡을 생각이었다.
포트리 버스터미널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텔마다 ‘No Vacancy’ 표지판을 걸어 놓았다. 큰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면 빈방이 있을거라고 기대하면서 안쪽 길을 따라 들어갔다. 꽤 걸었는데도 빈방이 있는 숙소가 보이질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No Vacancy’ 표시가 있어도 빈방이 있는지 물어보면서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갔다.
빈방이 없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오는 길에 버스가 지나온 브로드포드에는 빈 방 표지가 널려 있었는데 여기는 달랐다. 포트리는 스카이섬에서 가장 예쁜 항구가 있는 도시라 여행객이 많았던 것이다. 아! 이 낭패감. ‘비는 오는데 가족들을 어떻게 한담? 택시를 타고 브로드포드로 다시 나가야 하나? 택시는 있으려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체념한 상태에서 마지막 B&B 문을 두드리고는, 빈방 있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참 동안 전화를 했다. 빈방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말도 없이, 왜 이렇게 전화를 오래할까? 애가 탔다. 귀 기울여 들어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켈트족의 언어인 게일어가 쓰이고 있는데다, 영어조차도 게일어 억양이 심해 전화 내용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드디어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고는,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본인 집에는 빈방이 없고, 대신 빈방이 있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겠다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설마 내가 잘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겠지? 숙소를 소개해 준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잠시 후 아저씨 한 명이 농사용 트럭을 몰고 왔다. 아저씨를 따라가면 된다고 하기에, 아저씨 농장에 빈방이 있나 보나 생각했다. 아주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트럭을 탔다. 버스터미널로 가서 가족들을 태웠는데, 자리가 부족해서 나와 아들은 화물칸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가족을 태운 차는 왔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아저씨 집이 아주머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나?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화물칸이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차는 조용한 마을로 들어가더니 깔끔한 집 앞에 멈춰 섰다.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아저씨 농장이 아니라 할머니 집이 우리가 숙박할 집이었다. 빈방이 있는지 알아봐 준 아주머니는 차가 없어서 이웃집 아저씨한테 우리를 태워달라고 부탁했고, 아저씨는 우리를 빈방이 있는 할머니 집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다. 비 오는 날, 동양에서 온 이국인들한테 이렇게까지 마음을 베풀어주다니, 스카이섬 사람들은 천사의 ‘날개’를 달고 태어난 것일까?
할머니 이름이 예뻤다. 아달린(Adaliene) 할머니 집은 포트리 시내와 좀 떨어져 있었고, 적극적으로 B&B를 하는 집은 아니었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이 안 올 때 가끔씩 빈방을 B&B로 쓴다고 했다. 집은 매우 정갈하고 예뻤다. 우리가 묵을 방은 2층에 있었다. 더블침대 방에는 삼각형 천장에 유리창문이 부착된 예쁜 다락방이 딸려 있었다. 첫날은 비가 와서 별을 볼 수 없었지만 둘째 날 밤엔 침대에 누워 다락방 천장 유리창을 통해 별을 볼 수 있었다. 화장실은 반짝반짝 윤이 났고, 새 수건들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곳곳에 조각품도 많았는데 일본풍 그림 세 점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일본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다. 할머니도, 집도 영국의 품위와 예절을 뿜어내고 있었다.
언덕배기 끝까지 올라가 빈방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아주머니가 적극적으로 빈방을 알아봐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이 밤을 보내고 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좋은 숙소를 구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어느새 비가 약해졌고, 20분을 걸어가니 포트리 항구가 나왔다. 예쁜 항구를 거닐다가 터미널로 나와 Caledonian Hotel Restaurant에 들어갔다. 꽤 큰 호텔 식당은 만원이었지만, 금방 자리가 났다. 감자 야채요리, 소시지와 빵, 피시앤칩스 등 주문한 음식들은 예쁘게 장식되어 나왔으며 입에도 잘 맞았다. 스카이섬에서 생산되는 세 가지 Cuilin 맥주 중에서 중간 쓴맛인 Red Cuilin을 주문했다. 톡 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나는 독특한 맥주였다. 수량이 많지 않아서 스카이섬 안에서만 판다고 했다. Cuilin 맥주와 맛난 음식이 긴장했던 하루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B&B로 돌아왔더니 쿠키가 담긴 접시, 따뜻한 물, 홍차가 침대 맡에 놓여 있었다. 디저트가 달지 않으면서 고소했다. 스카이섬에서 우연히도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난 것이 꿈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