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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선생님

- 15살 선생님과 백발의 제자 -

by 빈스파

아이들은 집에서 키우는 상추만큼이나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훌쩍훌쩍 자라는 것 같다. 아이들 얼굴이 작년과 금년은 당연히 다르고 심하면 지난주와 이번 주가 다르니 말이다. 코로나로 가려진 마스크 속 얼굴들을 2년째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데, 간혹 물을 마시려고 마스크를 내리는 순간 어색한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코밑이 거뭇거뭇 해진 아이도 있고, 교정기를 끼고 있는 아이의 얼굴도 있다.

나는 수학학원 원장이다.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들어오는 아이들은 땀으로 합체된 마스크를 연신 얼굴에서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또 어떤 아이들은 늦게 왔음에도 왕의 행차처럼 참으로 느긋하다. 저녁을 먹고 오느라 늦는 경우에는 괜찮으니까 밥은 꼭 챙겨 먹으라고 항상 얘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냥 늦었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우리 학원에는 초등학교 3, 4학년 때부터 다니기 시작해 징그러운 중고등 학생이 된 친구들이 많다. 한 학원을 오래 다니는 경우가 흔치 않은 요즘이라 원장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일인데, 그러다 보니 아이들 속속들이 심지어는 가정사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경우가 많아 여러모로 신경 쓰게 되는 경우 또한 많을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다니기 시작해 벌써 내 키와 몸집에 버금가는 체구를 가지고 있는 중2 남학생이 있다. 수학은 안타깝게도 태생적인 역량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해서 꼬박꼬박 숙제하고 매우 성실하지만 매번 학습에서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인 학생이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초등 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어려운 내용들을 마주하며 고꾸라졌다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는데 그래도 요놈은 오뚝이 같은 열정과 의지로 항상 성실함을 잃지 않는 착한 학생이다.


중학교에 와서 처음 보는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고 정말 열심히 한다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수학에 온 힘을 다 쏟아붓는 모습이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59점. 사실 평소 수학역량을 알고 있어서 점수가 예상은 됐지만 그래도 워낙 열심히 노력했던 친구이기에 조금 더 좋은 결과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그동안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좌절하고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이 아이는 또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또 열심히 열심히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아이가 정말 대견하고 기특했다.


다시 기말고사 내신 대비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내신 대비 교재를 지급했는데 놀랍게도 이 아이가 가장 먼저 완료했다. 남들보다 서너 배는 더 틀리는 아이이기 때문에 노력을 몇 배로 한다고 해도 겨우 평균적인 이해와 속도로 진행할 수 있는 친군데 다른 아이들보다 무려 열흘이나 빨리 교재를 끝마쳤다. 선생님이 5장 숙제를 내주면 10장을 해오고, 10장을 내주면 20장을 해왔단다. 더 하면 할수록 오답이 늘어나지만 이를 다시 해결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만의 노력으로 모두 극복하면서 말이다. 심지어는 스스로 잘 모르는 내용들에 대해서 매번 선생님께 새로운 문제들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웃으며 그만 좀 연락하라 말씀하셨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밤이고 새벽이고 어려운 문제를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다 생각되면 선생님께 문자로 문제를 찍어 보내고 설명을 구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농담으로 그만 연락하라고 얘기를 하긴 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참 기특한 아이라고 애정이 간다 말씀하신다.

기말고사를 모두 마치고 아이의 점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89점


무려 30점이 올랐다. 아이가 풀이한 시험지를 보고서는 더욱더 놀라움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10번 안쪽으로 3개를 틀리고 이후에는 오답이 없었다. 이 말은 난이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문제들, 그리고 고난도 문제를 모두 풀었다는 얘기다. 오히려 선생님이 점수를 주기 위해 내신 평범한 난이도의 문제들에서 3개의 실수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 친구 100점을 맞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틀렸던 아이가 그 남들보다 더 뛰어난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 오로지 본인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결과이기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겨우 15살인데 말이다.


나는 오늘도 이 아이 앞에 선생님으로서 서 있다. 하지만 백발머리가 되어 가고 있는 이 나이에 15살의 이 꼬마가 점점 나의 선생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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