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애들은 왜 길로 안 다니니?”
일곱 살 난 아들 녀석들을 잠시 맡아 준 친한 언니가 나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두 아이를 부탁하고는 혹시나 예의 없는 행동으로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하던 차였다.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난스럽게 꺼낸 언니의 말에 언니와 아이들이 보냈을 시간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제멋대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을 두 아들 녀석과 그런 아이들을 단속하느라 진땀 뺐을 언니의 모습이 안 봐도 훤하다.
“미안해요, 언니.”
애들은 원래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는 언니와 적잖이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동동거리는 내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부탁 한 번에 쩔쩔 매고, 혹여나 불편함이나 피해를 주지 않았을까 홀로 전전긍긍한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다시 만날 일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그럭저럭 긍정적인 평을 들어야 안심을 한다. 그러니 도리가 없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지나치리만큼 조심스럽고 진지하다.
“날이 꽤 쌀쌀해졌네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면 무릎반사마냥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내뱉을 만한 흔한 인사 한 마디도 입 안에서 수십 번을 되뇐 후에야 겨우 꺼낼 수 있다. 그런 내 유전자는 남편의 기세등등한 DNA 앞에서 맥도 못 추고 지고 만 걸까? 내 뱃속으로 낳은 내 아이들은 남들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수리 끝부터 발톱 끝까지 완벽한 E형 인간이다.
이제 겨우 유모차에 타던 때부터였다. 육아휴직을 내고 온종일 집 안에서 사람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둘과 의미도 맥락도 없는 대화만 나누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1분 차이로 태어난 그들의 포동포동한 뱃살에 코를 파묻고 뽀송뽀송한 아기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면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날들이었으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까맣게 차오를 정도로 울어 젖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르고 달래고 빌고 사정해도 다 소용이 없다. 전투적으로 기저귀가방을 챙겨들고 쌍둥이 유모차 위아래 칸에 둘을 안착시킨 뒤 무조건 밖으로 튀어나가야 한다. 정처 없이 영혼도 없이 놀이터로 생태 길로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 거짓말 같이 울음을 그친다. 지나는 사람들 구경하다, 높게 솟은 건물과 형형색색 간판을 유심히 살펴보다, 흩어지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시끄럽게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 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르 잠이 든다. 그렇게 E형 쌍둥이 녀석들은 울음이라는 강력한 수단으로 I형 엄마를 집 밖으로 끌고 나온다.
아장아장 걷던 시절에도, 성큼성큼 뛰던 시절에도 E형 아이들은 어김없이 I형 엄마를 향해 소리친다.
“엄마, 나가자!”
집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 마냥 집이 좋은 엄마는 녀석들 등살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놀이터로 잔디밭으로 끌려 나간다. 가끔은 나와 같은 신세로 끌려 나왔을 동네 아이 엄마와 어색한 대화도 섞어 본다. 하지만 그 뿐이다. 다섯 마디를 채 넘기지 못하고 엄지손톱으로 애먼 손가락만 꾹꾹 누르다 대화는 끝이 나고 만다. 그러면 상대방이 됐든 내가 됐든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나선다. 마치 다른 볼 일이 생각났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엄마의 곤란한 상황은 아는지 모르는지 E형 아이들은 땀에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바쁘다.
E형 기질을 타고난 아이 둘을 키우려면 온 동네방네 얼굴 팔릴 각오쯤은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한다. 아이들 픽업을 위해 동네 수영장에 서둘러 들어갈 때면
“건이 강이 어머니 오셨어요?”
“오늘은 애들이 온 동네 네잎클로버를 다 찾아와서 선물로 주더라고요.”
라며 건네 오는 인사를 능숙하게 받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길을 걸어가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온몸을 맡기고 엉덩이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아이들 옆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거나 등을 돌리면 안 된다. 흥에 겨운 저 아이들이 도무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우면서도 정체 모를 그 춤에 간간히 호응을 보내줘야 한다. 주말 아침이면 느지막하게 일어나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들고 아침 햇살 내비치는 창밖을 바라보는 여유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유난히 활동적이고 목소리가 큰 아이,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것 마냥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E형 아이들과 시간을 공유하는 동안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한계에 부딪히는 날들도 종종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조롭고 지루한 내 삶에 들어와 웃음과 재미라는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어린 시절 나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거리낌 없이 해내는 그들을 보며 작은 쾌감을 느낀다. 가끔은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며 소소한 일탈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때때로 나도 예상 못했던 E스러운 내 모습을 발견하며 기분 좋은 생소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다 나도 E가 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