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레인디어> 그리고 <가여운 것들> 리뷰
* 이번 리뷰는 '습니다'체가 아닌 '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남성은 사디스트, 여성은 마조히스트?
어릴 때부터 지금껏 이어지는 악몽이 있다. 푸세식 변기에 쭈그려 앉아 있는데 칸막이 밑으로 얼굴 하나가 불쑥 등장하는, 알몸으로 군중 앞에 서 있는 꿈이다. 공중목욕탕, 공동샤워실을 이용하지 못한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 끔찍하다. 하의가 벗겨진 시체에도, 상반신이 드러난 여신에도 과하게 이입한다. 성폭행을 당한 적은 없다. 90년대 출생 여성이라면 누구나 기억 저편에 있을 법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겪었을 뿐인데, 나는 신체 노출에 아주 방어적인 사람으로 자라났다. 초2 시절, 한 남자애가 내 원피스 안쪽을 훔쳐보고 휘파람을 분 적이 있고, 모르는 동네 꼬마들이 양변기를 딛고 올라서서 내가 용변 보는 장면을 훔쳐본 적이 있다. 다 2차 성징 훨씬 이전의 일이다. 2차 성징이 있고선 막내 이모가 유난이었다. 이모는 ‘가슴이 커서 부럽다’는 원색적인 표현을 하며 보통 체형이었던 내 흉부를 만지려 들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또래 남학생들이 끼쳤던 해악에 비하면 그저 귀여운 정도였다. 중학교 입학하고선 ‘슴만튀(가슴을 만지고 튄다)’ 하는 남자애가 있다는 소문에 복도를 걷는 게 두려웠다. 성추행을 고발한 반 아이에게 담임이, ‘걔가 너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체벌 금지가 시행된 교실에서 매번 175cm의 태권도 부에게 위협당하던 담임이었다. 담임은 남자애들 앞에서 몸이 굳고 염소 목소리를 냈다. 얌전한 여자애들 무리가 그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던 표정도 기억난다. 체육 시간에 농구공으로 여자애들을 겨냥하고, 주먹질하고 발로 차고, 치마 입은 애 발 걸어 넘어트리는 놀이를 하고, 게임에서 배운 각종 쌍욕 그리고 포르노에서 보고 온 행위를 여자애들에게 실험하는 언어적 성희롱은 예삿일로 넘겼던 교실에서, 담임을 찾아갈 정도라면 상당히 큰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모든 난리통을 피하고 싶어서 등을 굽히고 다니던 것이, 지금껏 나의 구부정한 자세로 고착됐다. 그 무렵부터 나는 어른은 ‘벙어리’와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딸뻘, 조카뻘인 여자아이들이 어떤 일을 당해도 ‘알아서 처신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이들. 모름지기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린 시절부터 각종 성희롱 공격들은 알아서 쳐 낼 줄 알아야 한다는 듯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나오는 그 겸연쩍은 미소.
다행히도 나는 여고나 다름없는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도 황당무계한 인간상들은 있었지만, 어떤 짓도 참아 넘길 수 있었다. 성희롱에 즉각적으로 피가 끓던 시절을 지나고 나는 퍽 둔하고, 너그러워졌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선 자기 신체를 상품화하거나 굴욕적인 성관계에 자발적으로 응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궁금해했다. 프로이트의 사도마조히즘, 사르트르의 타자론을 심리 서적 읽듯 공감하며 보았다. 한스 벨머, 신디 셔먼 풍의 초현실주의 회화를 그렸다. 당시 로타라는 사진작가가 논란이 되었다. 나는 취약한 자기 모습을 남자 사진작가에게 부탁해 사진으로 남기는 여성의 심리가 궁금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오갈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나의 그런 추측은 남성들이 소비하는 여성 굴욕 판타지나 다름없었다.
성인이 된 후 보았던 포르노는 ‘스너프 필름’이었다. 일본에서 제작되는 포르노 열에 아홉은 남성에게 제압당하는 여성들을 찍는다. (드물게 여성향 포르노도 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왜곡이 심한 로우 앵글로 성기를 비추거나 클로즈 업 한다. 제일 자주 등장하는 남성 신체 부위는 그녀들을 주무르는 손이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여성의 얼굴은 더욱 보이지 않는다. 고개가 힘없이 고꾸라져 베개에 처박히거나 머리카락에 가려진다. 점점 사람이 아니라 살덩이, 신체 기관, 생물로 느껴지게 된다. 서사는 이런 식이다. 한 여성이 어떤 공간에 갔다가 우연히 강간을 당하는데, 이윽고 강간을 즐기게 된다. 디지털 성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하는 건 예사다. 성인 AV 배우가 교복을 입는 경우도 많고, 50~70대로 사이로 보이는 연로한 남성들이 그들과 성관계 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 남성들은 10대 시절부터 이런 AV를 통해 여성 착취를 학습하고, 현실에서 이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범죄는 다시 AV가 된다.
그래서 포르노는 남성의 시각이고, 사디즘적이다. 당연하지 않나? 여성은 포르노를 소비하기 어렵다. ‘저게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경각심이 완전한 몰입을 막는 것이다. 반대로 여성 일반의 시각은 마조히즘적이다. 여성 포르노(전혀 대등하지 않은 두 심리를 동일시하는 이 표현은, 학술 용어란다.)라고 일컬어지는 멜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선택당한다. 남성이 만남을 주도하고, 진행한다. (그래서 어떤 남성 시청자들은 자신이 자꾸 여성 캐릭터에 이입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그런 작품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로 우정처럼 시작하거나 여성이 적극성을 보이는 로코도 늘고는 있다. 그러나 로코 시청자들의 소비 습관은 변화가 거의 없다. 여자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얼마나 주체적이든, 그것과 상관없이 시청자들은 메이킹 필름과 예능을 보며 남배우의 눈빛을 ‘멜로 눈깔’로 이름 붙이고, 눈빛과 행동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것에 빠져든다. BL 장르의 약진에서는 안전하게 수(수비)에 이입하고, 공(공격)을 체험해보고 싶은 여성 독자들의 욕망이 엿보인다. 얼마 전 남배우A의 혼외자 소식이 구설에 올랐다. 여초 커뮤니티에는 ‘A가 아직도 못 잊는 여자’라는 기가 막힌 글이 올라왔다. A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떻게든 순정을 찾아내 ‘선택당하는 기쁨’을 창출해내려 한다. 개인은 어떻게든 기존 사회의 권력 구조를 내재화하는데, 그 과정에서 약자는 끊임없이 강자의 머릿속에, 눈길에, 자신을 어떻게 담을지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 착취의 대상이 되는 일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로 ‘택갈이’ 된다. 거기에 자그맣고 간곡한 희망이 더해져, ‘남자들이 못 잊는 여자’라는 로맨스 판타지가 된다.
초3 때부터 ‘종이 남친’ (<캔디캔디>의 남주인공) 테리우스가 꿈에 나오길 바라며 잠드는 등 극성 이성애자 소녀였던 나는 어느 순간 로코에 감흥을 팍 잃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종종 남성의 시각에서 포르노를 시청했다. 나 대신 남이 굴욕적인 상황에 처하는 포르노를 반복적으로 보면서 관음증적 욕구를 해소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녀들과 달리 나는 안전하다고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완벽히 이입한 적이 없다. AV 배우의 촬영 환경에 대해, 업무 강도에 대해, 성 산업에 대해, 반대 성별에 대해 늘 환멸이 났다. 모든 포르노 소비자는 소시오패스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마조히스트가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사디스트가 되고 싶었다.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다.
마조히스트가 되어 피해 희석하기
“내가 매춘부처럼 몸을 마구 섞으면, 내 몸이 내 일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전에 그랬던(당했던) 게 무슨 상관인가. 지금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면 상관없지 않은가.”
“그는 처음부터 내 이런 면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그렇게 혐의를 벗었다.”
<베이비 레인디어>의 주인공 도니는 나와 반대로 자신의 성적 트라우마를 마조히즘적 심리로 치환한 사람이다. 여성 피해자의 경우에도 사건 이후 방어적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잦은 일회성 성행위에 자신을 소모하는 피해자도 있다. 도니는 대리언이 자신을 성폭행한 일이 정상적인 성행위 안에서 몇 번이고 이뤄질 수 있는 대수로운 일이 되길 바랐다. 나아가 섹스 자체도 밥을 먹거나 똥을 싸는 행위처럼 별 고찰 없이 할 수 있는 행위가 되길. 몸은 성적 기능을 수행할 뿐, 자아가 아니라 내 머리에 달려있는 살덩이가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 도니가 가진 선택지가 부러웠다. 도니와 같은 남성은 마음껏 자신의 몸을 대상화할 수 있다. 성기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남성은 섹스 어필에 따를 수 있는 위험에 대해 모른다. 섹스 어필은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해서 손님을 모으는 행위와 다르다. 아무나와 끊임없이 섹스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있다고 치자. 그녀는 오르가슴을 느끼고 싶은 것이지, 장시간 후배위 자세를 취하느라 허리와 관절이 쑤시는 채로 무력하게 흔들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건 치우듯 제 몸을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치는 사람에게 인체 실험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다. 사람들은, 오르가슴이란 양자가 섹스에 성의껏 임하고 서로의 의사를 존중할 때 촉발된다는 걸 쉽게 간과한다. 모르는 사람과 일회성 성관계를 한다고 쳤을 때, 여성이 상대 남성에게 무례한 태도를 겪거나 강압적인 행위 혹은 폭행, 디지털 성범죄를 당할 확률이 남성에 비하면 90% 이상 높다고 본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의 몸을 기능적으로 바라보는 순간부터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남성에게 손쉽게 접근 가능한, 뒤탈 없는 ‘성적 대상’으로 비추어지기 쉽다. 그래서 여성은 피임에 더하여 그런 위험에서 스스로 방어할 임무까지 떠맡는다. 그러니 그런 여성은 존재하기가 힘들다.
AI나 다름없는 벨라
<가여운 것들> 속 벨라는 자위의 기쁨을 깨달은 후 자나 깨나 섹스를 부르짖는다. 나이 많은 난봉꾼 덩컨과 덜컥 여행을 떠나고, ‘즐거운데 돈도 벌 수 있다’며 파리의 사창가에서 일한다. 벨라가 사는 곳은 현실과 같은 가부장제 사회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성에 대한 폭행이나 살인 위협은 도사리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벨라는 자신이 원치 않는 추남과 섹스를 하게 될지언정, 임신하거나 주먹에 맞진 않는다.
벨라는 마치 오감을 느끼지 못하는 AI 같다. 이 모든 일을 겪고서도 자본, 불균등 분배의 문제엔 몰두하면서 몸에 대한 사유는 않는다. 아기는 자신의 손과 남의 손을 번갈아 만져보며 타인과 구분된 자신에 대해 알아간다고 했다. 벨라는 ‘자신의 몸’에 대한 어떠한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 자극에 움츠리지도 않고, 질에 사물을 집어넣는 것에 처음부터 두려움이 없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신체가 남의 것임을 아는 건지, 벨라에게 제 몸은 그저 기구이다. 그러니 영화 <가여운 것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타인의 몸을 마음껏 실험하는 괴생물체의 이야기일 뿐이다. 남편에게 감금당했고,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한 몸 주인 빅토리아의 고통은 대체 벨라에게, 그리고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벨라는 빅토리아를 해방시킨 게 아니라, 빅토리아의 몸을 멋대로 이용하며 한 번 더 그녀의 의지를 거슬렀을 뿐이다. 그래놓고 폭력 남편의 얼굴을 염소에 꿰어놓으면 그게 복수인가? 씨네21에 기고된 홍수정 평론가의 글에 나도 동의한다. 감독은 신체 훼손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페미니즘 서사를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여성 심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하지 않은 채 캐릭터만 갖다 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태도는, 그의 역량을 의심케 했다.
벨라 백스터에 대한 맥캔들리스의 충격적인 회고록은 그 와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아내 “빅토리아”의 폭로성 편지에서 완전히 부정된다. 내성적이고 낭만에 빠져 있던 남편과 달리 운동가, 사회주의자, 독지가로서 많은 역할을 했던 빅토리아는 미래의 후손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의문을 던진다. 왜 맥캔 들리스는 메리 셸리와 에드거 앨런 포 등 당대 유명 소설의 설정과 실제 사실을 교묘하게 섞은 이런 거짓을 만들어 낸 것인가? 그러고 나서 그의 공상을 “단연코 가장 병적인 세기라 할 수 있는 19세기에 존재한 모든 병적인 것들의 냄새”를 풍기는 이야기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극악무도한 패러디”라고 치부한다.
출처: <가여운 것들> 원작 소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4751
- [비평] 반복된 것이 본질에 가깝다, <가여운 것들>
‘자발적인 여성’ 판타지
<가여운 것들>의 원작 소설은 끝에서, 이 소설 자체가 남성이 곡해한 여성의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 <가여운 것들>은 각색에서 그 반전을 제외했다. 빅토리아의 몸에 접합된 벨라라는 존재가 바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아닐까 싶다. 앞서 말했듯, ‘자신의 몸을 기능적으로 바라보는 여성’은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남성이 바라보는 그런 여성을 ‘자발적인 여성’이라고 칭해보겠다. ‘자발적인 여성’은 남성이 성범죄 혐의를 부정할 때 주로 만들어내는 편의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안희정 성폭행 사건에서도 2차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안희정을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성폭행에 응했다는 망발을 해댔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똑 부러진’ ‘주체적인’ ‘성인 여성’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나를 음해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이 바로 전자의 그 시선을 이용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주요 행위주체들의 담론분석 결과,) 가해자 측은 성범죄 사건을 ‘합의에 의한 관계’ ‘불륜 관계’로 정의하면서 ‘법적 문제’에서 ‘도덕적 문제’로 전환시키고, ‘꽃뱀’ 담론을 끌어와 생존자를 가정 파탄을 초래한 ‘가해자’로, 안희정과 그의 주변 사람을 ‘피해자’로 이미지화했다. 또한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페미니즘 담론을 재해석하여 성폭력의 책임을 생존자에게 돌리는 전략을 취하며 성폭력 문제를 ‘개인화’했다”.
출처: <김지은입니다>
성폭행 가해자들은 범죄를 저지를 당시에는 여성이 수동적이길 바라고, 후에 피해자들이 자신이 ‘자발적인 여성’이었음을 깨닫길 바란다. ‘자발적’에는 앞선 의미에 더해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다. 그게 포르노 서사의 변곡점이자 그들의 카타르시스다. 범죄의 초반부에는 여성이 끔찍한 수치심을 느끼길 바란다. 그래서 의식이 없는 상태를 사진으로 남긴다. 의식을 찾아 반발하던 여성이 점차 남성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식의 연출을 한다. 그건 여성이 자신과의 성교에 감응하고 사랑을 느끼길 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지배당하고 종속됨을 즐기는 마조히즘적 심리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성적 대상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굴복당했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악랄하다.
또한, 남성들은 앞서서 도니와 같은 트라우마를 겪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신체를 쉽게 대상화한다. 불특정 다수의 여성과 섹스하길 욕망한다. 사랑과 섹스를 분리하는 ‘이상 심리’다. 남성들 사이에서 이런 ‘이상 심리’는 그다지 재고되지 않는다. 남성은 여성을 유형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엔 자신에게 ‘굴복당하는’ 약자로서의 여성과 자신에게 ‘사랑받는’ 여성이 존재한다. 창녀와 성녀 이분법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나? 그래서 어떤 남성들은 자신에게 ‘굴복당하는’ 여성과 성매매를 했기 때문에 성매매는 바람이나 불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착취하는 남성에게 다른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결론적으로, 남성들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여성에게 투사할 땐, ‘꽃뱀론’을 주장하고, 성적 대상으로 보고 싶을 땐 ‘자발적인 여성’ 이론을 펼치는 것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벨라를 통해 섹스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을 그리는 척하면서 ‘자발적인 여성’ 판타지를 재현했다. 우리는 벨라의 성적 취향을 알아내기 어렵다. 벨라는 자신의 오르가슴을 위해, 특정 체위나 애무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벨라는 남성에게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으며, 외모적 취향도 없는 것 같다. 연령에 따른 취향의 변화도 묘사되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의 첫사랑은 보통 오밀조밀한 얼굴의 꽃미남 소년에게서 시작해서 성인이 된 후 점차 전신으로 시선이 옮겨 간다. 하지만 아기였던 벨라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통통한 중년의 덩컨에게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남성성의 상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도니
다시 <베이비 레인디어>로 돌아가 보자. 도니는 트라우마 극복에 성공했을까? 여러 가지 섹스 실험에도 불구하고 도니는 점점 남성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성폭행을 당하는 중에 성감을 자극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성애와 불쾌함, 그리고 성애와 로맨스를 구분하기 어려워한다.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술김에 마음 없는 상대와 일을 치렀다던 일화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성폭행 피해자가 거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가해자에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품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 개인적으로는 마조히스트가, 사법적으로는 무고한 가해자를 고발한 ‘꽃뱀’이 되기 때문이다.
“마사가 나타나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마사는 내가 보여지고 싶은 모습(남성성)으로 날 봤다.”
하지만 도니는 대리언의 사건에 한해 그런 2차 가해를 당할 일도 없고, 당하지도 않았다. <베이비 레인디어>의 시청 평을 봐도, 여성들은 열심히 도니를 응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니는 대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가? 도니는 수치심에 시달린다기보단 남성성을 잃었다는 생각에 고통받는 것 같다. 나의 ‘약자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원래 부여되었던 ‘뭔가’(남성성)를 잃어서 수치스러워하는 감정에 가까울 것이다. 도니는 주로 여성들과 동일시되는 마조히즘적 심리를 느끼는 자신이 수치스럽다. 그래서 도니는 일부러 ‘더 하트’에서 마초들과 어울린다. 또, 매우 주도적이고, ‘공격’ 포지션에 있는 테리에게 매료되어 데이트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도니가 배부른 상황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니에게 마사가 무해한 이유:
자기객관화에서 자기대상화까지
혼란에 빠져 있던 중에, 도니는 마사라는 여성에게 스토킹을 당하게 된다. 도니는 마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간파했다. 도니는 특히나 ‘마이너함’을 식별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를 지녔다. 마사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직업도 없으며, 술집에서 마초 종업원들에게 농담거리가 되는 사람이다. 도니는 그런 그녀를 연민했다. 마사보다 나은 자신은, 마사를 경멸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사가 웬만큼 짜증 나게 굴어도 말이다. 도니는 한 인물에 대한 자신의 양가감정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배우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기객관화 기질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니는 취약하다. 이런 사고가 심화되면 자기객관화를 넘어선 과도한 자기 대상화가 된다. 유체이탈하듯 1인칭 시점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딸 이진은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우발적인 구타를 당해왔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엄마와 한집에 산다. 여전히 머리나 몸을 맞으면서. 이진이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가 한 부모 가장이며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힘으로 엄마를 떠밀어 떨쳐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진은 맞을 때면 우직한 소처럼 그 자리에 서서 방어하기만 하고, 공격하거나 피하질 않는다. 도니도 이진이 엄마를 대하듯 마사를 인내했다. 굴다리에서 강제로 성기를 추행당한 이후에도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그다. 도니는 유해 조류를 피해 다니듯 마사를 피해 다녔다.
도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설움을 응축해 마사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니는 알았다. 마사는 대리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지위도, 성별도. 그래서 도니는 마사를 간과했고, 회피했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부추겼다.
자신의 약자성을 무기로 삼는 약자를 대하는 법
도니와 다르게 마사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아픔을 동력 삼아 남을 더욱 공격하고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피해를 주장함으로써 도니를 공격할 수 있었다. 준결승 공연장에 찾아온 마사는 외려 자신이 도니에게 성희롱 피해를 입었다고, “도니가 나의 똥꼬를 원했다!”고 외치며 도니를 공격했다.
또, 약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약자들을 쉽게 타겟으로 삼는다. 도니가 잠시 정신이 번쩍 든 때가 있었다. 마사가 트랜스 여성인 테리를 밀어 넘어뜨리고 “내 나라에서 꺼져, 이 외국인아.”라며 혐오 발언을 내뱉었을 때였다. 마사는 도니가 아닌 도니의 옆에 있던 전 여자친구나 현 여자친구에게 돌진했다. 그녀들은 도니보다 약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도, 엄마는 딸에게 “내가 장사 하면서 동네 여자들 밑구멍으로 나온 걸 다 받아 내. 나도 풀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한다. 이는 사실 그들이 익힌 생존 본능일 것이다. 여성이 같은 여성에게 더 쉽게 드러내는 여성 혐오, 검열에서 이런 심리가 잘 드러난다. 출판 업계에서 레즈비언 트위터리안들이 바이 지향성을 가졌으며 결혼까지 한 소설가 김세희가 소설 안에서 레즈비언들의 당사자성마저 침해했다고 항의하여 결국 <항구의 사랑>이 출판 정지까지 갔던 일이 있었다. 작중 묘사를 보면, 소설을 통해 아웃팅을 당했다고 주장한 레즈비언 동창생은 사는 내내 자신의 지향성을 외적으로 드러내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에 의해 자신이 ‘징글맞은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 유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들이 재현 윤리의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논점을 바꾸고 있다고 느꼈다.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검열하는 데에 몰두하는 자기 파괴적 행동이라고 느꼈다.
나는 도니와 같은 경험이 있다. 불안정해 보이거나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간과한다. 사실 그건 그들을 우습게 보는 태도였던 것이다. <베이비 레인디어>를 감상하며 앞으로 더욱 그런 회피적인 태도를 버리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약자일지라도 그들이 지닌 공격성을 분명히 짚어주어야 하겠다. 분노의 칼은 올바른 방향으로 휘둘러져야 할 것이다.
여성을 대변하는 남성의 서사가 아닌, 여성의 서사를 바란다
친밀한 가해자, 그리고 무기력한 피해자. 그의 성장과 혼란한 감정을 온전히 담아낸다는 점에서 <베이비 레인디어>는 그 의미가 충분하다. 하지만 한편 이게 신선한 이야기로 느껴지고, 여성 시청자들에게 사랑받는 현실이 씁쓸하다. 전형적이지 않으며 여성을 대변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보고 싶다. 피학성과 가학성 사이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갈 수 있는, 가끔은 혼란스러워도 누군가의 쉬운 먹잇감이나 꽃뱀이 되지 않고 본인으로 남을 수 있는 여성의 서사를 바란다. 그런 맥락에서 <러브 달바>의 연출적 태도가 인상깊었다.
2024년 11월 30일에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