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리뷰
암컷 같은 엄마, 수경
고양이는 새끼를 짧으면 4개월, 길면 6개월 동안 데리고 있다가 독립시킨다고 합니다. 다큐멘터리나 어린이 자연관찰 책 속에는 그 습성이 슬프게 스토리텔링 되어 있죠. 성체가 된 새끼 고양이가 어느 날 담벼락에서 어미를 만났지만 알아보지도 못하고 영역 다툼을 할 뻔했는데요, 결국엔 싸우지 않고 슬쩍 피하는 게, 어렴풋이 서로를 기억하는 것 같다는 식입니다. 동물에게 부모와 자식은 뭘까요. 서열 상 위아래에 위치하는 친구나 동료 같은 걸까요? 인간의 시각에서는, 그들이 무정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간의 새끼가 본격적으로 부모를 멀리하고 가출을 꾀하게 되는 시기인 사춘기가, 양육을 끝내야 한다는 동물적 신호가 아니었을까?’ 자식 방문을 닫느냐 마느냐 다투다가 결국 부모가 컴퓨터를 거실로 뺐다는 에피소드는 동물들의 영역 다툼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물질적, 비물질적 자본을 물려주어야 하니 대학 진학까지 유예 기간을 5년 정도 더 둔 것 아닐까요. 개인의 계급과 자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가정에서 보육하지 않고 초·중·고등학교와 보육원이 통합된 시설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게, 인구수 유지와 인재 육성 측면에서 더 효율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인간 세대가 과잉 양육을 하고 있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아량을 베푸는 거라고 본다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속 이정은 부모에게 폐를 끼치는 자식이 맞습니다. 독립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2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엄마의 집에 머무르는 주제에 엄마가 동거인의 의무를 다하기까지 바라거든요. 엄마 수경은 이정을 무능력한 존재로 몰며 지긋지긋하게 여깁니다. 마치 2000년대 한국 공중파 시트콤에서 아내가 돈벌이를 못 하는 백수 남편을 대하듯이요.
그러나 생존을 위해 동물이 어미에게 사냥과 주거지 탐색을 배워야 한다면,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의식주 제공 외에도 아이를 집에 방치하지 않고 학교나 또래 집단 같은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노출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정 폭력을 저지르는 부모가 나쁜 이유는, 이런 의무도 간단히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밥 주고 재워줬다고 자신을 괜찮은 부모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부모의 의무를 다한 건 아닙니다. 아이에게서 신뢰와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기 전에 싹을 잘라놓았는데요. 그러니 그 부모들은 아이의 생존을 위협한 게 맞습니다. 이 영화 속 수경도 그렇습니다. 수경이 정말로 살의를 품고 이정을 시시때때로 죽이려 들거나 밥을 굶기진 않았기에 이정이 목숨을 붙이고 살아는 있었지만, 이정은 관계 맺는 법을 모르는 어른으로 커버렸으니까요.
또, 수경은 딸의 졸업식을 잊어버려놓고 속상해하는 딸을 내팽겨치고 애인을 만나러 간 전적이 있습니다. 현재도 수경은 비싸게 주고 산 야시시한 디자인의 팬티를 딸과 공유하고, 딸이 손 빨래하게 하고, 콘돔을 집 변기에 버리죠. 그 모든 행동들을 통해 수경은 간접적으로 이정을 위협하는 부모였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성적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굉장히 거북한 것으로, 나아가 위험신호로 다가옵니다. 엄마 아빠가 바람을 피워 가정이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 나를 양육하지 않고 떠날 수 있다는 두려움, 존경스러운 부모의 상이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 등입니다.
하지만 많은 TV 시리즈들은 어른의 시각에서 부모의 성을 소재로 활용합니다. 일요일 아침 엄마 아빠의 방에 들이닥쳤다가 스킨십 장면을 목격하는 아이들의 노이로제를 개그 거리로 삼아요. 드물게 아이들의 불안함을 재현한 것이 <마더>(봉준호, 2009)입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도준과 그의 엄마 혜자의 성에 대해 불안함을 품게 되죠. 도준이 성범죄를 저지를까 봐, 혜자가 성매매를 할까 봐, 도준과 혜자가 도리에 어긋나는 근친상간을 할까 봐 두렵습니다. 영화는 깔아놓은 뉘앙스를 결국 다 빗나가며 끝이 납니다. 성적 존재인 인간이 혈연관계에선 한없이 무성애 적이어야 하는, 그러나 개개인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품게 되는 불안함을 잘 표현했습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도 노골적인 제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수경의 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불안함을 조성합니다.
카메라가 파고들지 못하는 표면, 이정
보면서 저는 수경보다는 이정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김세인 감독은 영화 속에서 이정을 파고들지 않습니다. 이정에게 친한 친구나 애인은 있었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는지, 취미는 있는지, 꿈은 뭔지, 무엇보다도 엄마랑 왜 자꾸 싸우는지 설명해주지 않아요. 카메라는 현재 이정의 일상을 다큐멘터리처럼 비출 뿐입니다. 카메라가 1인칭이 아닌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정은 아동 학습지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집에 머무르고, 엄마의 속옷을 손빨래해주고, 마트에도 함께 가지만 화가 난 엄마에게 차 안에서 얻어맞습니다. 영화는 싸움의 발단을 생략하고, 말싸움이 폭력으로 치달은 부분부터 보여줍니다. 이정은 마치 소처럼 우뚝 서서 엄마의 폭행을 버텨내고, 그럴수록 수경은 이정을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이정과 수경이 갈등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몸싸움에서 점점 ‘둘 다 왜 저렇게 살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습관같은 현재의 격투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모녀의 과거가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유년기의 갈등, 고3 시절의 갈등, 스무 살의 갈등은 어땠을지. <마더>에 혜자의 작년도 전적을 암시하는 조연의 대사가 등장하듯, 수경도 그녀의 언행으로 인해 형사 사건에도 휘말렸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그걸 보여주는 대신 영화는 수경과 이정각자의 일상을 보여주길 택합니다. 그래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싸움으로 가득하지만, 갈등이 끌어내는 서스펜스는 없는 영화입니다. ‘급발진인가, 실수인가, 고의인가’의 의문 또한 이정과 수경의 갈등을 통해 점차 밝혀지지 않고 후반부에서 싱거운 화해로 일단락됩니다. 현실적인 회피적 태도에서 나아가 깊이 있는 말싸움이 들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갈등으로 가득하지만, 갈등으로 진행되지 않는 영화
제가 최근에 쓴 단편의 주제는 ‘성희롱을 당한 자가 아닌 행한 자의 심리에 주목하자. 그가 자신의 언행과 의도를 검열하게 만들자.’였습니다. 초고를 쓸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 주제는 이야기 속 인물들보다는 곧 (단편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 저의 태도에 관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성희롱을 목격한 후, 신고를 해야 한다며 피해자를 쫓아다니는데요, 성희롱이 아니라 퍼포먼스라는 궤변에 혼란스러워하다가, 피해자로부터 ‘일상이 망가지질 원하지 않는다.’는 체념 조의 말을 듣고 태도를 바꿔 가해자를 찾아가 의중을 캐내려 질문을 쏟아내는 엔딩입니다. 저는 주인공의 전환점이랍시고, 피해자를 비추던 카메라 시야가 주인공에 의해 가려지는 야심 찬 숏도 구상했습니다. 하지만 합평을 거치면서 알게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도 몰랐지만) 서스펜스를 꾀하려 수사물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수사물에서 도출될 만한 메시지가 아닌 생뚱맞은 메시지가 주제로 붙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사를 통해 얻어낼 진실이 아니라 수사하는 자의 태도에 관해 경고하는 메시지를 붙인 격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야기를 만들 땐 창작자 안에서 장르에 맞는 재미를 첨가하려는 의도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매번 충돌합니다.
김세인 감독은 어쩌면 이십여 년간 축적된 이정의 피해를 카메라로 들춰내는 게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신 엄마 수경을 따라다니며 연인과 근로자로서 그녀의 노고를 담았던 건 아닐까요? 수경을 애틋하게 보아서 그렇게 연출한 게 아니라, 속이 보이지 않는 가해자라는 미지의 생물을 가만히 관찰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타깃 관객층의 문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타깃 관객층은 누구일까요? 이정과 비슷한 나이대의 2~30대 여성은 이 영화를 보며 추억 회상(?)도 하고 씁쓸한 자조를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이정이 계속해서 회사 사람들이나 소희, 수경의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피해를 읍소하듯, 이 이야기도 '당사자성'을 가진 이들 외에도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읍소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을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수경도, 이정도 확실하게 편 들지 않고요. 그랬을 때 오히려 심드렁한 관객들에겐 ‘저소득 한부모 가정의 불행사’정도로만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발언권을 주겠다고 결심했을 땐, 서슴없이 그의 이야기를 파고들 에너지도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