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오는 하고 싶은 대로 한 걸까, 못 한 걸까?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by 정신차려 moziri



하야오는 하고 싶은 대로 한 걸까, 못 한 걸까?

꿈에서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화가(painter)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베껴 그린 듯 구체적인 형태가 보여도 결국 화가가 베낀 것은 현실이 아닌 자신의 심상입니다.

하지만 심상을 나열했다고, 그게 세계가 되진 않습니다. 회화는 결국 세계가 될 수 없고, 포털에서 영화 제목을 검색하면 포스터와 함께 몇 장 게시돼 있는 스틸컷과 비슷합니다. 이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회화를 할 때 저는 늘 답답했고 막막했습니다. (물론 물감의 물성과 아우라를 추구하는 작가들과 저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달리 영화는 세계입니다. 종종 감독들은 인터뷰에서 '마음속 이미지로부터 작품을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그 이미지는 백일장 시제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 이미지를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배치하기 위해,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고 개연성을 맞추고 톤 앤 매너를 쌓는 데에 훨씬 긴 시간을 보냅니다. 이를 게을리해서 이미지가 조금만 앞서도, 영화 전체의 감흥이 떨어집니다. 미술관에서도 영화를 미술의 인접 분야라고 생각하여 서사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작품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미지만으로는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만은 이미지와 서사의 결합 비율에 구애받지 않는 천재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의 영화 속 모든 장면이 그가 그리고 싶어서 그린 꿈 속 풍경 같음에도 인물이 살아 움직이고, 세계가 아름답고, 보면서 눈물이 났으니까요. 이미지 과잉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인공이 난관을 돌파하는 방법은 초현실적일지라도, 목표가 뚜렷하고 감정은 사실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대들)는 안 그랬습니다. 이미지가 과했어요. 이입을 못 한 채 하야오의 속뜻을 생각하며 관람했습니다. 엄마 잃은 마히토에서는 하야오의 어린 시절을 읽으려 했고, 성게 머리의 큰할아버지에선 후계자를 찾는 데에 실패한 하야오의 감정을 짐작하려 했습니다. 사실 그 마음을 헤아려보는 과정에서 이미 눈물은 났습니다. 다 보고 나와서 ‘넷플릭스에 작품(송출권)을 판 돈으로 만들었다’는 카더라 글을 접하곤 ‘하야오 할아버지, 하고 싶은 대로 잘 하셨어요.’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어서 과잉이 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후 영화관에 가서 한 번 더 봤습니다. 감기 기운에 졸기까지 했지만 엔딩에선 또 울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노트북으로 다시 봤습니다. 그런데 뜯어볼수록 생각이 반대로 뻗쳤어요. '과연 하야오는 하고 싶은 대로 한 걸까? 작화나 연출이 균일하지 못함이, 절제되지 못한 창작자 하야오의 즉흥성의 흔적이 아니라, 감독 하야오의 제작 공정 퀄리티 케어 실패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에반게리온의 혼다 다케시를 작화 감독으로 데려오고, 3D 툴을 활용하고, 요네즈 켄지에게 엔딩곡을 의뢰하는 과정을 하야오가 잘 통제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대들>의 의미와 형식 중 형식에 집중하여 이 의문을 해소해보고자 합니다.



실사 촬영 영화(live action)같은 챕터1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으러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를 챕터1로 보자면, 챕터1은 하야오 애니메이션보다는 실사 촬영 영화 같습니다. 일상적인 소음을 강조한 사운드 믹싱과 낮은 채도의 배경, 3D 툴을 활용한 인물의 움직임, 데포르메가 덜된 동물 캐릭터, 씬의 불친절한 전환, 실사 촬영 영화 같은 카메라 워크 때문입니다.


① 3D 툴을 활용한 움직임과 앵글

<그대들>에서도 <에일리언: 로물루스>같은 최근 SF 영화들의 게임 그래픽스러운 향취가 느껴집니다. 사실감이 극대화된 느낌입니다.

게임 <아웃라스트2>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토토로>

첫 장면.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마히토의 시점에서, 앞서 올라가는 아버지의 동작이 로우 앵글로 보입니다. 마치 센을 쫓는 가오나시처럼 동작이 우악스럽고, 호러적입니다. <이웃집 토토로>의 계단 오르는 메이와 비교해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토토로>는 계단의 측면에서만 찍은 반면, <그대들>은 인물의 바로 위아래에서 찍었습니다.(애니메이션 용어를 모르겠어요.) 전쟁 통의 정신 없음을 연출한 것이라기보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을 두 번이나 보여주며 기술을 선보이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또, 경보음 소리가 귀를 찌를 정도로 크게 울리는 와중에도 다다미를 오가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믹싱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이후 외갓집 저택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일상적 소음을 부각해서 사실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느껴졌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 실사 촬영 영화 같았어요.


<꿈과 광기의 왕국>(2013)에서 하야오는 <털벌레 보로>의 제작 과정에서 3D 기술자들과 미팅을 가지는데, 그는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짓이라며 3D 기술에 반감을 표합니다. 그 기술자들이 보여준 게 하필 상하체가 따로 노는 괴기스러운 모션이기는 했어요. 그랬던 하야오가 <그대들>에선 3D 툴로 인물의 움직임을 구현했으니, 어쩐지 서글펐습니다. 고집불통 할아버지가 뜻을 굽히는 데에 얼마나 많은 불안이 작용했을까 싶었어요. 후술하겠지만, 하야오는 여러 번 뜻을 굽힌 것 같습니다. 이 기술 혁신은 영화 안에 사실적 움직임과 게임 그래픽 같은 모션이 공존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시로, 나츠코와 마히토가 오르자 기우뚱하는 인력거의 움직임 같은 건 굉장히 실감 납니다. 반대로 앞선 계단 장면이나 통조림에 몰려들어 우글거리는듯한 할멈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게임 같습니다. 그렇게 신기술(?)이 선보여지는 와중에 원래 하야오의 특기였던 아동의 표정과 동작 연출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움츠린 자세로 뛰는 센의 소심한 달리기, <이웃집 토토로>에서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좋아서 수염을 움찔거리는 토토로 등 캐릭터 특성을 꼭 반영하는 만화적인 연출들이 사라졌어요. 마히토가 유독 무뚝뚝한 소년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야오가 관찰력의 대상을 인물에게서 조류로 옮긴 걸까요? 어쨌든 제게 이 영화에서 감각되는 3D 툴의 모션은 이질적이었습니다.

<이웃집 토토로>
<이웃집 토토로>


② 부자연스러운 장면 전환

공습에서 4년 후 도쿄를 떠나는 장면으로 전환되며 정적인 음악과 함께 마히토의 내레이션이 깔립니다. 다음 장면에선 기차역 부감을 배경으로 타이틀이 뜹니다. 관객들을 놀리나 싶을 정도로 동적인 장면과 정적인 장면을 생뚱맞게 이어붙였습니다. 이렇게 격차가 큰 장면 전환이 이후에도 몇 번이나 등장해요. 평화로움을 과하게 강조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기차역과 자연 풍경을 느리게 팬 업·다운하거나 누구의 시선인지 모를 부감으로 비춥니다. 이전 하야오 작품에서 팬 업은 치히로의 시선에서 목욕탕의 위용을 보여주거나, 하울의 성을 좇는 소피의 시선에서 구름 사이로 성의 정체가 드러남을 연출할 때 쓰였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에선 별 의미 없이 사용되었어요. 그런 부감들의 앵글들도 제각각입니다. 소나무길과 저택 전경은 아이레벨로 찍고, 기차역과 저택의 정문은 하이 앵글로 찍었습니다. 숏이 이어 붙을 때 조금씩 이질감이 듭니다.

특히 공습 장면에서의 전환이 급작스러웠던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영화 시작부터 무작정 달리는 <탈주>처럼, 하야오 영화 속 오프닝 크레딧의 공식을 깨고 달리는 마히토로 영화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프롤로그는 더더욱 요즘 실사 촬영 영화의 경향 같습니다. 영화적 연출은 또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 간 날을 몽타주 처리한 것입니다. 마히토의 첫 소개부터 하굣길에 벌어진 싸움, 그 후 혼자서 돌로 머리를 치는 장면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하야오 기존 작품에 몽타주는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③ 불필요한 뉘앙스를 부여하는 숏들

나츠코와 마히토가 기우뚱거리는 인력거를 타고 갑니다. 나츠코는 싫다는 마히토의 손을 자신의 임신한 배에 갖다 댑니다. 인력거꾼의 어깨 너머로 관객이 그 광경을 훔쳐보는 듯한 오버 숄더 숏으로 찍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아빠와 나츠코의 스킨십 장면을 목격하는 장면 또한 2층에서 1층을 엿보는 구도로 찍었습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아버지와 나츠코를 성숙한 어른들이 아닌 우스운 로맨스 중에 있는 연인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조숙한 소년 마히토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관객에 따라 감독이 나츠코에게 섹슈얼한 뉘앙스를 부여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마히토를 심적으로 고갈시키는 에피소드들을 계속 전개하면서도 마히토의 심리는 부여주질 않으니 관객은 이입 못 한 상태에서 돌아가는 상황에 혀를 차거나 마히토를 걱정하며 보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감독이 무뚝뚝한 태도로 무심한 듯 섬세하게 인물들의 감정을 포착하는 좋은 영화들도 있어요. <러브, 달바>같은. 하지만 그런 작품들 속 동작은 역동적이지 않을지언정, 인물의 세심한 표정이 보여집니다. <그대들>에서 마히토의 심리 표현을 절제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④ 낮은 정도의 데포르메

데포르메를 거치지 않은 ‘생’ 왜가리의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못생긴 강아지 힌 보다도 훨씬 진짜 동물 같아요. 그래도 우리 동네 하천에 서 있는 잿빛 왜가리보다는 털도 풍성하고 안광도 있지만요. 더 문제적인 건 왜가리남 설정입니다. ‘당나귀 가죽을 쓴 공주’처럼 꺼림칙한 비주얼의 재래식(?) 요술을 통해 왜가리 가죽을 뒤집어 쓴 왜가리남이 완벽한 왜가리로 변신하는 매커니즘입니다. 재래식 요술은 징그러움을 자아냅니다. 치마를 덮어쓰며 스르륵 새로 둔갑하는 유바바와 달리, 왜가리남은 왜 주둥이 속으로 모공이 큰 코가 드러나도록 연출되어 관객들이 관람 등급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일까요? 두꺼비가 마히토를 덮치는 장면도 그렇고, 아동 관객을 고려하여 수위 조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전 새의 잇몸이 부풀어 오른 줄 알고 정말 경악을 했으나 ‘내가 하야오 작품에서 이런 걸 본다고?’ 하며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가리는 성대모사도 너무 못합니다. 오히려 마히토의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흉내 내는 것 같지 않나요?

<당나귀 공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왜가리남



⑤ 모호한 시간 감각

장면 전환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또 다른 원인입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이 영화 속 시간 감각을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리얼타임에 가까운 느린 장면이 보여지다가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거나 CUT TO로 별 변화 없는 숏이 이어집니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하루하루를 보여주기 때문에 큰 의미 없는 장면 전환이 많이 들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디테일 또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예를 들어 마히토가 저택의 중앙 현관으로 들어가서 나츠코를 따라 복도를 얼마간 걷다가 할멈들이 있는 부엌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이미 인력거꾼이 내려두고 간 짐을 풀어보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저택의 공간과 모르는 상태에서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죠. 인력거를 타고 온 나츠코가 펑크가 나서 늦었다고 말하는 숏 뒤에 바퀴에 바람을 채우는 버스를 비추는 것도 혼란을 부릅니다.


이와 다르게 의도된 혼란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히토와 나츠코 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가 다른데, 둘이 사라지는 장면에서 이를 알 수 있도록 시간이 조절되어 있습니다. 마히토가 산책을 나설 때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어김없이 “도련님~”을 부르며 찾는 할멈들과 나츠코가 등장합니다. 마히토가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쳐 탑의 입구에 몸을 욱여넣고 있을 때도, 저택 저편에서 이쪽까지 꽤 먼데도 불구하고 할멈들은 기척도 없다가 마히토가 뒤를 돌아보면 굴의 입구에 우뚝 서 있어요. 마히토가 방에서 왜가리를 보면, 뒤에 바로 이모가 오는 장면도 두 번 반복 됩니다. 호러 영화에서 주인공이 모르는 다른 경로로 빠르게 이동한 침입자나 점프 스퀘어 장치 같습니다. 그와 달리 나츠코가 잠옷 차림으로 나왔을 때는, 마히토가 두꺼운 책을 반이나 읽을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습니다. 나츠코는 보여지는 것과 다르게 소외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후의 수색 작업에서도 할멈들은 나츠코와 마히토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지 않고 마히토의 이름만 반복해서 부르며 찾으러 다닙니다. 하지만 우선 <그대들> 속 시간 감에 관객들이 익숙해지게 한 후에 이 차이를 보여줬어야 나츠코가 느낄 소외감이 관객에게 와 닿았을 겁니다.



⑥ 집 소개가 빠졌다.

<이웃집 토토로>에선 사츠키와 메이가 2층 계단을 찾으려 뛰어다니는 장면으로 집을 소개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선 하쿠가 치히로의 머리에 ‘가마 할아버지한테 가는 경로’를 요술로 직접 넣어줍니다. 꼭대기 층에선 유바바의 손가락에 의해 대문에서 가장 안쪽 내실까지치히로가 곧장 끌려갑니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포뇨와 소스케가 좁은 집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놀죠. <그대들>은 관객에게 친절히 장소를 소개하지 않고, 그냥 보여줍니다. 저택의 입구에서 나츠코가 마히토의 신발을 벗게 한 뒤 방을 가로질러 갈 줄 알았는데 빙 둘러 복도로 지나가더라고요. <그대들>에서 제일 중요한 공간인 탑 내부도 마찬가지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마히토가 팰리컨의 공격을 받은 후, 키리코에게 구출돼 배를 타고 간 곳은 무덤의 뒤편입니다. 그리고 키리코의 집에서 히미의 집까지 이어지는 정글 같은 숲은, 앵무 왕이 탑의 꼭대기에서 히미의 유리관을 들고 큰할아버지의 공간까지 이동할 때 다시 등장합니다. 이처럼 관객은 중첩되는 공간을 보고 위치를 유추해야만 합니다.





2024년 10월 21일 작성한 글입니다.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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