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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Jan 31. 2024

편지 일곱,

-내맡김과 내려놓음-


위트릴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지는 봄꽃들을 봅니다. 함성처럼 피었다가 환호처럼 지는 꽃들. 덕분에 땅이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반려견 또또와 산책하면서 만난 한 그루 겹벚꽃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분홍과 연초록빛이 그윽하게 조화를 이룬 나무를 한참 올려다보면서 말했지요. 



“꽃이 져도 당신을 잊지 않을게요. 가슴 가득 행복을 안겨줘서 고마워요.”

꽃이 알아들은 모양입니다. 실은 말하지 않아도, 바라보기만 해도 아는 눈치였습니다. 



“이곳을 오가는 숱한 이들이 있지만, 그대처럼 가슴 뛰게 나를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소.”

그가 감탄하듯 나뭇가지를 살짝 흔들며 답했습니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요. 

이 나무를 작년 가을부터 봐왔습니다. 그때는 이 나무가 겹벚꽃나무라는 사실을 몰랐지요. 푸른 잎들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저 지나치기만 했지요. 이제 이 나무는 제 마음속에 자리한 특별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꽃과 잎이 다 진 날에도 화사한 빛을 품어내던 날을 기억할 테니까요.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일어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위트릴로,

최근 열흘 동안 저는 이상한 나라 안에 있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함께 웅크리며 있는 현재를 살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고요했지요. 하나밖에 없는 결혼한 딸은 카톡의 프로필 사진을 제가 보지 못하게 해버렸고, 가족 단체 카톡방에서 탈퇴하고 말았습니다. 5월이 되면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귀국해서 오기로 했는데, 이쯤 되면 오지 않을 게 뻔합니다. 오래전 저는, 아니 오래 갈 것도 없이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이렇게 태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온갖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견딜 수 없어 했을 테지요. 제 마음 안에 들이찬 평온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딸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작년에 발간한 ‘하와이안 드림’이라는 소설 때문입니다. 그 소설 속에 자신의 이야기가 까발려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 잘 돌봐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원망이 그만 최고점을 찍고 만 겁니다. 그렇다고 나는 악한 엄마가 아닙니다. 그리고 내 딸은 불효자가 아닙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른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마음의 그릇이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테지요. 지금은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이지요. 



위트릴로,

예전의 저는 이렇게 초연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딸이나 어머니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지요. 조금이라도 원망을 듣거나 공격적인 어투를 대하면, 대번에 나 자신을 무너뜨렸습니다. 스스로 나를 자근자근 밟고 발로 걷어차 버렸지요. 너는 그래도 싸! 너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러고도 네가 살 가치가 있어? 그렇게 악마는 제 영혼을 갉아대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잔소리와 악다구니의 파장은 엄청났지요. 내 안에 부정 감정을 주렁주렁 단 나무의 뿌리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백을 하자니 쓴웃음이 날 지경입니다. 어쩌자고 그렇게나 뿌리를 내리게 놔두었을까요. 저는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 대여섯 살 적부터였을 겁니다. 어머니의 화풀이는 날마다 계속되었고, 언니와 저는 매일같이 매를 맞고 욕을 들어야 했지요. 어머니의 정신이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이십 년이나 간호사로 근무를 하면서도 말이지요.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언제부터 에너지가 긍정으로 바뀌셨어요?

저는 주저 없이 답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나서부터요.”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코 내 힘이 아닙니다.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기를 당해서 엄청난 빚만 떠안게 되고 만 서른 초입.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울면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먼저 새벽 예배를 마치고 와서 밥을 안치고 있는 어머니를 봤지요. 갑자기 내 입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갑자기 뭔가 잘못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어머니가 다가왔지요.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있던 내 앞으로 어머니가 와서 섰습니다. 



“네가 나를 다 사랑하나?”

어머니가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지요. 저는 다시 말했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우리는 동시에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생애 최초로 어머니한테 했던 고백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갑자기 인생이 펴진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를 이루던 에너지가 부정에서 긍정으로 돌아선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거든요. 그 이후로도 저는 숱한 실수를 저지르고, 시도했던 것도 잘되지 않고, 십 년 동안이나 빚을 갚아야 했지요. 그렇지만 지금의 저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을 압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요. 심한 변덕과 욕설과 화가 나면 물건을 부수는 것까지 그대로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정말 희한하게도 어머니가 그냥 사랑스러웠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주방에 서 있던 어머니한테 그 말을 하도록 한 것은 분명 내가 아닙니다. 굳게 닫힌 내 마음을 활짝 열게 하고, 입술과 혀를 움직이게 한 것은 나보다 더 큰, 내 안의 존재입니다. 저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만물을 움직이고 만사를 주재하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성공 방식을 표방하는 이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이미지로 떠올려서 입 밖으로 내고 이미 되었다고 믿고 선언하라.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고 여기고 초연하라. 이미 가진 자는 탐하지 않고 초연할 뿐이다. 그래도 멋진 기회가 오면, 바로 날름 받아먹고 기뻐하라. 그것이 바로 물질이든 꿈이든 성공을 성취하는 길이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부정적인 상황이 닥쳐온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여기고 이미 가진 자답게, 현자답게 마음을 비우고 있으면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 그러니 마음을 비워라. 많이 걷고 명상하고 단식이나 소식을 하면서 현자의 자세를 취해보라. 그러다 보면, 현자가 되기 마련이다. 

귀가 솔깃한 말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들을 때는 그럴듯한데, 어디 현자답게 초연할 수가 있을까요? 그게 어디 쉽나요? 그래도 해라! 하면 된다! 그 억지로 하는 것이 벌써 초연과 거리가 먼 것이 됩니다. 



위트릴로,

제가 옳은 것인지 어떤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근에 겪고 있는 이 평온함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합니다. 귀 기울여 들여주실 거지요?

자주 저를 이상한 나라로 보내봅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지요. 환하고 아름답지만, 눈이 부시지 않는 빛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나고 죽고 병들고 아픈 과정이 없는 곳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구별조차 없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고, 거짓으로 둘러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자신의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위트릴로, 68년 전에 이 땅을 떠난 이후 그대가 계신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이 순간을 바라보면, 갈등과 고통은 별 게 아닌 것이 됩니다. 아픔과 고민조차 빛납니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 다음 확실한 한 마디 명쾌한 결론이 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잘될 수밖에 없다.  

3차원적 시각으로 봐서는 분명히 엉망진창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저와 단절을 해버렸고, 최근에 나온 몇몇 책들은 잘 팔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뢰로 똘똘 뭉쳐있는 까닭에 책을 발간해준 출판사 대표는 이제 무기력에 빠질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잘 될 수밖에 없다니요? 도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할까요? 

이 말을 알려주신 이 또한 하나님입니다. 3차원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섭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긍정은 긍정을 끌어당기고, 부정은 부정을 끌어당긴다고요? 그러니, 부정을 집어치우고 긍정만 생각하라고요?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부정투성이인데, 긍정을 생각할 겨를이 도저히 없는데도 긍정을 떠올리라니? 미치지 않고서는 도대체 이 말을 할 수가 없는데도요? 



위트릴로,

그랬습니다. 이번 달에 교소도에서 심상 시치료 특강을 진행했을 때, 저는 재소자들한테 이 말을 함께 해보자고 했습니다. 축복을 가져오는 주문이라고 했지요. 지금 당장 감옥에 있는데 잘 될 수밖에 없다니? 무슨 막말인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물리적 감옥뿐만 아니라 마음의 감옥 안에 이중으로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감옥’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불안, 답답함, 초조함, 억울함, 부담감 등등이지요. 내가 이만큼 했으니 보상이 따라와야 하지 않겠냐는 기대 논리가 들어맞지 않아 오는 좌절도 있지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한마디로 하면 ‘화’입니다. 화는 밖으로 표출될 때 폭력이 되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울, 혹은 무기력증이 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의 감옥을 벗어날 축복 같은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모든 것은 잘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말의 근원적 힘은 ‘섭리’에 있습니다. 내가 하려고 드는 게 아닐 때 이 말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잘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신이 하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졌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한 나라에 머물렀던 체험으로 말하자면,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이 나를 그릇된 길로 이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완벽하니, 이 모든 삶의 과정도 완벽합니다.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미완성되고 흠이 가득한 상태가 실은 완벽한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는 빛나고 실수는 아름답습니다. 고통의 순간은 영혼이 찬란하기 위한 멋진 기회입니다. 놀랍게도 이 원리를 알아차리니,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초라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할 것이기 때문에 잘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온전하고 나중도 온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안과 부정조차 온전합니다. 긴장과 초조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이 열릴 때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닫힐 때도 똑같이 박수를 보낼 수 있습니다. 꽃이 피었던 봄에만 나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온 계절 통틀어 나무는 아름답습니다.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끊임없이 축복이 임하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바라며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해서 가진다는 상상을 하고, 가지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뜻한 대로 되지 않은 일도 많았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내려놓음과 내맡김의 핵심은 ‘섭리’ 속에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섭리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을 인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현자가 되는 비결인 ‘초연함’은 섭리를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신은 신의 방식대로 완벽하게 임하는 중입니다. 그러니 불안과 우울과 초조와 긴장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화’라는 감정조차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 감정들을 쫓아내고 억지로 평온만 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화’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화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듣게 됩니다. 



너, 이러고도 화가 안 나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화가 한풀 꺾여서 고개 숙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재미를 못 본 화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도 봅니다. 그러면 나는 너무나 유쾌해져서 웃고 맙니다. 이 모든 게 삶의 조화이지요. 살아있으니 겪게 되는 감정들입니다. 애써서 부정하지 않으니, 부정이 자신을 부정하며 녹아서 흐르고 맙니다. 실은, 이 모든 것이 제가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압니다. 어머니께 사랑을 고백했던 날, 제 마음을 움직이신 성령님이 하신 일이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딸은 아마도 오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딸은 오겠지요.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감정 중에서 저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사랑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도 제가 한 결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호흡 하나도 혼자의 힘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섭리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불안은 한낱 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김만 불어도 힘없이 떨어져 나가버린 먼지 말이지요. 



위트릴로,

이것이 바로 내맡김과 내려놓음의 핵심을 이루는 ‘섭리’에 대해 알아차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제가 할 일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한평생이 걸렸습니다.


   


-2023. 4. 26. 시아-
      




 * 이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고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한 모리스 위트릴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구순이 넘은 제 어머니와 연관되어 치유와 관련한 체험을 공감해줄 위트릴로한테 띄우는 간곡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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