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만남: 무지갯빛

by Sia


열두 번째 만남: 무지갯빛




-이제, 정말 마지막 날이 되었네요.


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마지막 때는 오고야 만다. 그게 어떤 마지막이 되었든. 시간은 어떤가. 일 분 일 초가 마지막이고 또 새롭게 시작한다. 그러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것이다. 그곳에서 마지막은 또 다른 새로움을 기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결 차분한 표정으로 라가 적어온 과제를 꺼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감사합니다’를 하는 것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한테 드리는 경배와 같다. 나는 특별한 신앙이 없지만, 그분을 ‘신’이라고 믿는다. 밤에 잠들기 직전에 하는 ‘감사합니다’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있어서 하루를 살아냈다는 것이 더없이 감사하다. 그렇게 ‘감사합니다’로 마음의 샤워를 하고 난 뒤에 ‘괜찮아. 잘했어. 잘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나에게 보내준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정오 무렵에 도도새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안아준다. 가슴께에 두 손을 엇갈린 채 모아서 양어깨를 토닥토닥해 준다. 부드럽고 포근하고 편안해진다. 내가 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게 또 이상하다.


분명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직전만 해도 죽으려고 했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은 그 자살 사고가 저 멀리 사라진 것을 느낀다. 수평선에 작은 점으로 멀어지다가 결국 그것마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그 자살 사고한테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했다. 다시 그 사고가 실수로 돌아오더라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를 어쩌지 못한다. 괴물 같던 크기가 줄어들어 조개껍데기만도 못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껍데기가 저절로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는 것을 그저 웃으며 지켜볼 것이다. 절대로 오지 않을 거야! 이제는 절대 돌아오지 마! 이런 외침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온다고 하더라도 뭐, 건질 게 없을 테니까. 그러면 자살 사고는 심심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여기는 다시 올 데가 못 된다’라고 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이런 습관이 붙었으니, 이제 프로그램을 끝난 뒤에도 계속할 것이다. 어쩌면 이건 마음 보험일지도 모른다. 힘들 때 헤쳐나갈 수 있는 든든한 마음 보험! 제대로 마음 보험을 들게 하신 마음 보험 설계사이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마음 보험 설계사’라니! 참, 라다운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항상 그렇게 하려고 하는 성질인 ‘항상성(homeostasis)’은 생물이 최적의 조건에서 벗어나는 변화를 최소화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마음에서도 이 항상성이 작동한다.


항상성이라는 단어는 1865년 클로드 베르나르가 제안하고, 1926년 월커 브래드포드 캐넌이 창안했다. 처음 이 단어를 쓸 때는 생명의 존속에 대한 의미였다. 유기체가 생존할 수 있는 기전을 일컬었지만, 지금은 기계의 자동 조절 장치를 설명할 때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항상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 항상성의 개념이 안정화와 최적화를 목표에 두고 마련되었다면, 심리적인 항상성은 좀 다르다. 그것은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성질’을 기본에 두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을 가지고 태어난다. 철학자 존 로크가 말한 깨끗한 석판을 의미하는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의 의미는 아니다. 존 로크는 인간이 태어났을 때 흰 도화지와 같지만, 외부 세계로부터 감각적 활동과 경험을 통해 도화지가 채워질 때 지적 능력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런 지적인 무지로서의 타불라 라사 상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원만하고 진실한 면모를 뜻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의 항상성을 말한다. 시각으로 형상화하자면, 하얀 물감을 떠올릴 수 있다.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무수한 일들로 인해 감정들이 일어나고, 그 감정이 자리 잡게 되면서 이 항상성은 다른 국면에 맞닥뜨리게 된다. 원래의 하얀 물감이 검은 물감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항상성이 깨진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검은 물감으로 갈아타면, 이 부정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부정 항상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야 생존 가능하다고 믿고 그런 가치관을 내세우며 살기 마련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항상성을 지켜나가게 된다. 웬만해서는 이 부정 항상성이 잘 깨지지 않는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믿으며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심리적 긍정 항상성은 깨지기 쉽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긍정 항상성은 순수한 만큼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각고의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고운 눈이 내려와 있는 눈밭 위를 밟고 지나가면 이내 더러워지는 이치와도 같다. 이 항상성이 깨져서 부정 항상성이 형성되었다면,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심리적 항상성’은 생존을 위해 내면에서 형성된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정신의학자이며 영적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레이먼 호킨스((David Ramon Hawkins)는 인간의 의식 수준을 나타내는 단어와 점수를 함께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에 이어진 에너지 수준은 늘 일정하게 맴돈다는 것이다. 에너지 200 미만은 항상 그 상태에서 바닥으로 갔다가 다시 200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왔다 갔다 한다. 에너지 200 이상은 그 아래로는 가지 않고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고, 더욱 성숙해지게 된다. 그가 밝힌 에너지 200은 ‘용기’이다.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돌아보고 직면하는 용기부터 긍정으로 선순환된다. 그 아래는 놀랍게도 에너지 175 수준이고, ‘자부심’이다. 자부심은 뿌듯하고 으쓱한 마음이니 좋은 의식이라고 여길 수 있을 텐데 아니다. 자부심은 자존감과 다르다. 자존감은 내적으로 충만한 자신과 세상에 대한 감사가 바탕이 된다. 누군가 기분 상하게 말했다고 해서 자존감이 함께 내려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쁠 수는 있겠지만, 그게 궁극적으로 자존감까지 끌어내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올바른 자존감이 있다면, 역경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면서 극복해 나갈 수 있다. 호킨스가 말한 ‘자부심’은 ‘자만감’에 가깝다. 남들보다 뛰어난 자신을 생색내며 드러내려고 하는 거짓 자존감 말이다. 거짓은 언제든 탄로 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우쭐거리다가 다음 순간이 되면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비참하게 갉아먹는 것은 ‘수치심’이다. 가장 바닥인 에너지 20 수준인데, 그런 상태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해서, 많은 경우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정반대로 의식 수준의 가장 최고 에너지는 700에서 1000 정도의 숫자로 표현되는 ‘깨달음’이다. 알아차리고 깨우치는 이 ‘깨달음’의 순간에 인간의 영혼은 한없이 고양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각’이다. 자각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또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서 우주의 에너지와 연결하게 한다.


통합 예술·문화치유인 심상 시치료에서는 치료의 목표지점에 ‘자각’이 있다. ‘마음의 빛’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치유가 일어난다고 본다. 호킨스가 ‘심리적 항상성’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성질을 암시하고 있다. 일정하게 맴도는 마음의 상태를 ‘심리적 항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에너지도 덩달아 그렇게 흐르게 된다. 심리적 긍정 항상성은 긍정 에너지가, 심리적 부정 항상성은 부정 에너지가 삶 속으로 흘러들게 한다. 한마디로 하자면, 심리적 항상성은 생존을 위해 항상성을 부여잡고 있는 심리적인 기전을 일컫는다.


‘심리적 긍정 항상성’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되고 평안한 상태를 뜻한다. 부정적 자극이 있어서 일순 부정적이었다가도 긍정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회복 탄력성’이다. 하얀 물감에 검은 물감이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 더 많은 하얀 물감으로 이를 정화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이런 회복 탄력성이 잘되지 않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바로 ‘심리적 부정 항상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검은 물감 천지가 되어 버리면, 그 성질을 단단하게 유지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하얀 물감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검은 물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하얀 물감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왔으니 계속 이렇게 살면 된다고 자신을 다잡으며 타인과 세상을 비난하기 일쑤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직면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치욕스럽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뚫고 나가면 ‘용기’가 자리 잡게 된다. 그럴 때 놀랍게도 신의 은총처럼 하얀 물감이 부어지게 된다. 호킨스는 에너지 수준을 끌어올리는 경험은 거의 드물고, 추락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보았다. 단 몇 점의 증가만 해도 내면의 힘은 큰 발전을 보일 수 있다고도 했다. 인간이 평생 끌어올리는 에너지는 불과 5점에서 7점을 왔다 갔다 할 뿐이라고 한다. 겨우 그 정도라니! 누구나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채 살아가고 있다.


호킨스에 의하면, 전체 사회 문제의 약 92퍼센트는 의식 수준 200 이하로 측정되는 사람들 때문이다. 게다가 영적 진화는 의식 수준과 관련이 있다. 영적 진화를 호킨스식대로 표현하자면, ‘자아에 대한 충성’과 ‘진실에 대한 충성’ 간의 균형을 나타낸다.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현실에서 잘 얻어내고자 꾀를 낸다. 부와 명예와 육체적 건강에 대한 욕망에만 충성하는 것이 자아의 역할이다.


분석심리학자인 융식으로 표현하자면, 영적 실재가 반영된 ‘진실’에 충성하는 것은 자기의 역할이다. 마음을 원으로 볼 때, 원의 중심점이자 마음의 핵심이 바로 ‘자기’이다. 심상 시치료 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곧 ‘빛’이다. 이 빛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에너지 또는 신과 하나가 되어 소통한다. 호킨스는 이것을 ‘빛 비춤의 근원’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참나, 큰나, 근원의 나, 내 안에 주인공인 신, 내재하신 하나님, 불성 등등 어떤 표현을 해도 같은 의미다. 이 빛을 자각하면 할수록 치유가 일어난다. 그것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일상에서 치유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겨우 5에서 7 정도의 의식 변화가 아니라 수십 점 정도 훌쩍 뛰어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라의 나이 때 나는 분명 에너지 20인 ‘수치심’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때 누군가 ‘빛’이 마음에 존재한다고 얘기하면 나는 그를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다음 순간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다. 지금 사기 치는 거냐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십 년이 흐른 다음, 호킨스의 대표 저술의 제목처럼 ‘의식 혁명’을 이루었다. 그래서 사기 치는 치료사가 아닐 수 있었다.


‘마음의 보험’이 큰 역할을 했다. 과거에 지녔던 심리적 부정 항상성은 내게 뻗친 역할이 컸다. 그때는 영혼을 갉아먹는 소리들을 속속들이 받아먹고 흡수한 나머지 파멸적인 부정 에너지가 저절로 작동되던 상태였다. 제대로 자각하고 난 뒤에는 영혼을 살게 하고, 온전히 살리도록 마음을 썼다. 그렇게 마음 길을 내니, 신의 은총이 임했고 놀라운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심리적 긍정 항상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변화의 순간은 벼락처럼 다가왔다. 평소에 줄곧 하는 영혼에 긍정성을 주는 습관은 위기 상황에서 절묘하게 발휘한다. 보험이 그렇듯이 마음 보험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힘든 순간에 여지없이 나타나 제 역할을 한다. 마음은 탄력을 받아 이내 회복하고 긍정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그의 소설 ‘두 여인’에서 “타고난 순수는 위험하나 모든 것을 겪고 난 다음에 체득되는 순수는 지극히 중요하고 귀하다.”라고 했다. 통합 심리학을 정립한 켄 윌버 또한 같은 맥락으로 얘기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최초의 물러남처럼 보였던 것은 실은 지금의 원초적인 움직임이었다. 본증묘수,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한 지금이 바로 그 움직임이다. 대양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질을 적시면서 자유롭게 해변을 넘나든다.”라고 했다. 본증묘수(本證妙修)는 본래의 깨달음은 반드시 스스로 드러나서 묘하게 닦아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깨친 상태에서 추구하는 수행으로 깨침의 유지이고 일상의 실천을 말한다. 처음부터 주어진 순수가 빛바래지기 쉽다면, 나중에 다시 그 순수를 되찾은 뒤로는 결코 빛바래지지 않게 된다. 그때 비로소 영혼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라는 제대로 해낼 것이다. 검은 물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뚜렷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마지막 회기에 준비한 까비르의 시 ‘그대 안의 정원’을 ‘투첼로스’의 ‘Hallelujah’를 배경으로 낭송해 보자고 했다. 라는 연꽃 위에 내려앉은 이슬 같은 목소리로 시를 낭송했다.



그대 안의 정원


까비르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마라.

그대 몸 안에 꽃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가만히 앉으라.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한 아름다움을 보라.



까비르(1440년~1518년)는 인도의 영적 시인이다. 그는 인도 베나레스에서 베틀 짜던 직공이었다. 평생 단 한 줄의 시도 손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아름다운 시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까비르는 수피즘(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등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신비주의 사상)과 박티운동(종교적 민중 운동)이 낳은 위대한 영감의 원천이며, 인도 민중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또 타고르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시집 '기탄잘리'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제목, ‘그대 안의 정원’이라는 말부터 마음을 끌어당긴다. 대개 아름다운 꽃을 만나기 위해 정원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이미 내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꽃잎을 안고 있는 그 연꽃이 되어 가만히 앉아보라고 한다. 그렇게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한 아름다움을 그저 바라보라고 한다. 우리는 몸 안, 보이지 않는 정원이 있는 마음을 잘 떠올리지 않는다. 내 안을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다. 그저 보이는 육체에 집중한 채 온갖 걱정과 근심을 떠올린다. 점점 갈수록 노화가 진행되는 몸, 어딘가 알 수 없게 망가져 가고 있는 몸. 건강에 자신을 잃어가는 몸,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고 용을 쓰기도 한다. 이제. 그런 몸이 아니라 몸의 안,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까비르는 권하고 있다. 수천 개의 감정,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안고 있는 한 송이의 연꽃의 향기를 맡아보라고 한다. 그저 연꽃만 바라보라는 게 아니다. 내 안에 핀 그 연꽃의 자리에 앉아보라고 한다.

켄 윌버는 ‘무경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좌선할 경우,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좌선을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이 부처와 같이 행동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신은 아주 먼 곳에 있어서 외쳐 불러야 겨우 들을까 말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우리 마음의 중심에 신이 계신다. 인도와 네팔인들은 ‘나마스테(Namaste)’라고 인사를 나눈다. 나마스테는 산스크리트어로 ‘당신 안에 있는 신께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다. 연꽃 위에 앉는 것은 신과 합일된 에너지를 가진다는 뜻이다. 신은 외따로 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심판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인간 마음의 중심에 신이 빛으로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소우주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바퀴’, ‘순환’이라는 뜻을 가진 에너지 센터를 ‘차크라(Chakra)’라고 한다. 가부좌로 앉은 상태에서 가장 아래쪽부터 정수리까지 차크라는 모두 일곱 개다. 차크라마다 상징하는 빛깔이 있는데 순서대로 나열하면,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이다. 우리 몸이 무지개라니!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니, 그 어떤 아름다운 꽃이 정원에 피어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만 눈을 돌릴 게 아니다. 빛나는 아름다움이 바로 내 안에 들어있다.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다. 스스로 구박하고 핍박하고 더럽다며 야멸차게 내동댕이치면서, 수치감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살아왔다. 내 안에 고운 무지개가 있다는 사실을 마흔을 갓 넘기고서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알코올중독 전문 병원 중독연구소 소속 연구간호사였다. 알코올 환자 여럿이 모인 홀에서 사람 모양 그림을 그린 뒤 차크라에 동그라미로 표시하고, 그 안에 차크라대로 색깔을 칠해서 보여주면서 말했다.


“우리는 모두 무지개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이제, 이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고 누릴 때입니다.”


이 생각만 하면 신이 난다. 나를 얼마나 저주하고 원망해 왔던가. 나를 어둠 속에 가둬놓고 포승줄로 꽁꽁 묶고 나서 숨 막히게 문을 잠근 채 처박아 둔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무지개라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 우리 모두가 무지개라니! 그렇게나 혐오스러워하던 인간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되었다. 세상과 인간과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지고 있었다.


인상 깊은 구절에 대해 묻자, 라는 가장 마지막 구절인 ‘아름다움을 보라’라고 했다.


-나를 아름답게 본 적이 없었어요. 대충 괜찮네, 정도가 엄청난 칭찬이었어요. 아주 많이는 나를 흉하다고 여겼어요. 엄마가 늘 그랬으니까요. 악한 년, 못된 년, 못생긴 년, 그렇게요. 거울을 보면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흉악한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요. 그런데 한 번은...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하굣길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였다. 평상 위에 앉아있던 이웃 아줌마가 자신의 어린 딸을 보면서 말했다. “저기, 저 언니처럼 너도 크면 예뻐져라. 저 언니, 참 예쁘다. 그치?” 나는 당연히 누군가 내 뒤에 따라오나 보다, 저 말을 할 정도면 나도 쳐다봐야겠다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아줌마를 봤다. 아줌마는 나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봤는데 정말 없었다. 분명 나를 가리키는 게 맞는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못생기고 바보고 멍청이인데, 저런 말을 들을 가치가 없을 텐데...... 아니, 어쩌면 내가 잘못 안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못 생기지 않고 바보도 아니다. 멍청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내게 퍼부은 모든 욕들은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방어할 줄도 몰랐다. 그렇게 스펀지처럼 어머니 말을 곧이곧대로 빨아들인 채 어른이 되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면서 치료사가 되었다.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서서히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한테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해보자고 했다. 온몸과 마음을 이완하면서 오직 호흡에만 집중해 보자고 했다. 이미 라가 자각한 마음의 중심에 있는 옥빛을 고스란히 떠올려 보자고 했다.


“내 마음의 핵심, 중심, 심지에 존재하고 있는 옥빛을 떠올린다. 이 빛은 언제나, 늘, 변함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 빛은 신 또는 우주의 에너지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 빛을 고스란히 지금, 이 순간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옥빛을 있는 그대로 느껴 보자. ...... 지금, 이 순간 옥빛이 내게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어떤 말이 들리는지 귀 기울여 보자. ...... 이 말에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옥빛과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엇이라고 대화를 나누는지 그대로 들어보자. ...... 이제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할 때도 옥빛을 떠올리며 메시지를 들어보기를 원하면 이 옥빛은 내게 빛의 메시지를 들려준다는 것을 나는 지금 알고 있다. 이제 이 느낌을 간직한 채 세 번을 세면, 눈을 뜨면 된다. 하나, 둘, 셋.”


라가 눈을 뜨면서 환하게 웃었다.


“잘하고 있구나. 참 기특하다. 내가 언제나 널 응원하고 있단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아름답고 귀하고 빛날 거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거란다. 사랑한다.”


옥빛이 한 메시지라고 라가 들려주었다. 라는 그저 “고맙습니다”라고만 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라와 함께 마음의 빛을 찾기 위한 12번의 마음 여행을 다녀왔다. 라는 내 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라는 저번 회기에 직접 지은 시에 진분홍 연꽃을 그리고 감사하다는 메시지까지 적어 코팅한 것을 내밀었다. 선물이라고 했다. 오늘 진행할 까비르의 시에 나오는 연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신비스러운 동시성이었다. 라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과 닮아서요. 특히 홍련이요. 선생님한테 홍련향기가 납니다.

라는 치자꽃이고 나는 홍련이라고? 우리는 잘 어울리는 조합일까?


라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라의 나이 때 심상 시치료라는 것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감성과 감수성으로 내면을 자극해서 영혼의 치료에 이르는, 통합 예술 ‧ 문화 치유인 심상 시치료! 가난하기 그지없었던 나에게 규정에 어긋나지만, 그래도 프로그램에 흔쾌히 초대한 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알코올, 도박, 여자 중독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천만 원이라는 사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이나 결혼하고 헤어지는 실수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내 사랑하는 딸도 손자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아,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내 삶의 치욕스러운 부분을 싹둑 잘라내기를 원하고 있나? 아니다. 나는 오로지 어머니한테 초점을 맞춰서,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온갖 충동들을 멈췄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 긴박한 충동 때문에 내 삶은 말할 수 없이 진흙탕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숱하게 자살을 생각하고, 몇 번은 시도까지 해보고, 그래도 안 죽는 인생에 저주를 걸며 살아왔다. 그렇게 바닥을 치니, 다시 날아 올라갔다. 그렇다. 나는 다시 날개를 쫙 펼치고 날고 있다. 바닥을 치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바닥을 쳤다’는 것은 그 직전까지만 해도 날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닥을 쳤다’는 것은 다시 날 수 있는 발 구름판을 딛고 뛰어올랐다는 것이다. 지금은 유유히 날개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껏 즐기는 중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참 많은 험난한 고개들을 넘어왔다. 안 죽고 살아있어서 가능한 이야기다. 라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찾아가도 되나요?”


라를 꼭 껴안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마침내 팔을 풀었을 때, 내 얼굴 속에 녹아있는 라의 얼굴을 알아차렸다. 찬찬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옥빛 하늘에 붉은 도장처럼 찍힌 태양에서 뻗어온 한 자락 빛이 함께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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