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잘했어, 잘할 거야’는 말씀하신 대로 도도새가 나를 안아주는 것을 떠올리며 날마다 했어요. 자기 전에는 ‘감사합니다’를 하고 난 뒤에 했어요. ‘감사합니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또 밤에 잠들기 직전에 계속했어요. 한 사흘간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일부러 포스트잇에 적어놓고 했어요. 침대 머리맡에 붙여두고 그대로 읽었어요. 그러다가 나흘째부터는 자연스럽게 그 말이 나왔어요. 감사할 일이 없는데도 ‘감사합니다’를 했어요. 웃을 일이 없지만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기듯이요.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했습니다.
라는 분명 자신의 에너지를 바꾸는 중이다. 태어날 때 가졌던 하얀 물감 대신 자리 잡은 검은 물감에서 이제 다시 하얀 물감으로 탈바꿈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감사’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단어다. ‘감사’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 긍정 에너지가 되어 대상한테 전달된다. 마음은 전하는 만큼 돌아온다. 에너지는 무경계이기 때문이다. 미움을 전하면, 미움이 돌아오고 감사를 전하면 감사가 돌아오게 된다. 특정한 대상이 없는 채 감사드릴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할 경우, 감사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상황한테 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감사 에너지는 신한테 곧장 전달된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우주의 에너지라고 해도 좋겠다. 중요한 것은 감사가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긍정 에너지다. 그것은 혼자 해낸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미덕으로 인해 크게 확장된다. 영적인 것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이가 ‘감사’를 자주 한다면, 서서히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된다. ‘영적’이라는 것은 신비스러운 영역이 아니다. 3차원인 육체와 4차원 이상인 마음이 함께 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이끌고 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2CELLOS의 ‘Every Breath You Take’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해서 고진하의 ‘오래된 기도 화답 시’를 낭송해 보자고 했다.
<오래된 기도> 화답 시
고진하
이 휘황한 세상의 유혹에 한눈팔지 않고
한 목표를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안에서 자꾸 일어나는 허랑한 욕심과 집착을
매일 조금씩 덜기만 해도
나를 휘둘리게 하는 바깥일에 거리를 두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폭풍을 잠재우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르며 자라는 나무들의 침묵과 고요를 내 존재의 안뜰에 들여 가꾸기만 해도
삶의 주인이 내 심장보다 더 가까이 살아 계심을 알아채기만 해도
행복이 물질의 획득이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으신 분에게 있음을 깨닫기만 해도
영혼의 성장은 서서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느긋한 마음으로 진정하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내가
우주의 꽃이라는 것을 자각하기만 해도...
-아, 이 시가 저번 시간에 했던 ‘오래된 기도’에 대한 답시인 거군요! 두 편의 시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 듯합니다. 닮은 듯도 하고, 다른 듯도 해요.
라의 말에 빙긋 웃으면서 시의 바다로 안내했다. 바다의 푸른 물결 위에서 갈매기 소리를 듣거나 파도 소리를 즐기는 것은 라 스스로 해야 한다고 했다.
1953년에 출생한 시인 고진하는 기독교 영성가이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2016년 제13회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라가 말한 것처럼, 이 시는 이문재 시의 ‘오래된 기도’를 읽고 고진하 시인이 답하는 시이다. 휘황한 세상의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광채가 나서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이 세상에 한눈팔기는 얼마나 쉬운가. 욕망과 욕구를 솟아오르게 하는 세상이다. 돈만 있으면 제일일 것만 같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돈을 번다는 번지르르한 말을 해대는 사기꾼은 얼마나 많은가. 갈수록 세상은 온갖 욕망을 분출할 유혹을 해댄다. 그것과 반대로 사는 이, 욕망에서 멀어지는 이들은 오히려 멍청이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도 한 목표를 바라보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보라고 놀림을 받더라도, 욕망에 굴하지 않고 한 목표를 향해 올곧게 나가는 것만으로도 기도하는 것이라니. 그러기가 쉽지 않다.
속이 텅 빈 껍질로 부풀려진 욕심도 집착도 일어나는 게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덜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게 하는 여러 바깥일에 거리를 두는 것,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폭풍을 잠재우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계속 그 안에서 맴돌게 된다.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나 화풀이 대상이 되었을 때, 정신이나 신체적으로 폭력을 당하면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잘되지 않는다. 그자가 왜 그딴 짓을 했는지 분통이 터질 뿐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은 폭풍우가 되어 내 머릿속에서 계속 요동을 친다. 그런 생각의 폭풍을 잠재우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까? 잠재워달라고 기도만 하면 되는 걸까? 시인은 잠재우는 기도를 해라고 노래하지 않는다. ‘잠재우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조금 더 넘겨보자. 그다음에서 답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하늘을 우러르며 자라는 나무들의 침묵과 고요를 내 존재의 안뜰에 들여 가꾸기만 해도 기도이다. 나무들은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 정해진 자리에 붙박여서 그대로 자라난다. 비탈지면 비탈진 대로, 높고 가파르면 또 그런대로. 벼랑 끝이라면 또 그곳대로. 그렇게 하늘을 향해 자라난다. 침묵하면서 고요하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인다. 그 나무의 에너지를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며 가꾸는 것이 기도이다. 그것은 섭리를 받아들이는 마음, 순리에 수용하는 마음일 것이다. 폭풍을 잠재우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욕망과 분노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부정감정들은 떠나게 된다. 거부하지 않고 있으면 거부감은 스스로 거북해져서 떨치고 나가 버리게 된다.
삶의 주인이 내 심장보다 더 가까이 살아 계심을 알아채기만 하는 것도 기도다.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 나 자신이 내 심장보다 더 가까이 살아 계시다니, 이건 무슨 말인가? 삶의 주인은 나이지만, 하루에도 오만 번도 더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러니, 삶의 주체는 나보다 더 큰 나이다. ‘더 큰 나’는 신 또는 우주의 에너지와 하나가 된 나이다. 태어나서 살게 하고, 또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하고, 섭리대로 만물을 관장하면서 내 안에 이어져 있는 신 또는 우주의 에너지다. 그러니 내 안에는 흔들리고 유혹에 약한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작은 우주이기도 하며, 신성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마음의 중심, 영혼의 핵심이 빛나고 있다. 이 빛은 그저 관념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한 에너지로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내가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않든 그렇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럴 때 생각의 폭풍우는 그치고 잠자게 된다.
많은 이들이 행복은 물질의 획득이나 축적이라고 여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물질을 탐낸다. 그것 때문에 경쟁하고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한다. 행복은 마음이 충만할 때 선물처럼 오는 감정이다. 충만감은 마음의 중심, 영혼의 핵심에 초점을 맞춰서 내면의 소리에 충실히 따를 때 이뤄진다. 물질이 주는 기쁨은 쾌락이고, 순간이다. 충만은 행복이고 깨달음이다. 시시때때로 겉으로 맴돌면서 변덕스럽게 바뀌는 말들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내는 자아의 오랜 습관이다. 반면, 깊은 마음에서 행복을 주시는 존재를 깨닫는 것이 기도이다.
영혼의 성장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이 땅에 온 목적이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맺고 끊는 것을 좋아하는 자아의 몫이 아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득과 실이 뚜렷해서 경계를 지으려고 하는 자아가 해낼 역할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아를 없앤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자아가 없으면 삶도 없다. 자아가 튼튼하지 않으면 정신병에 노출되고 만다. 자아가 없다면, 제대로 살 아갈 수 없다. 그렇지만 단단한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내면이 열린다. 튼튼하고 견고한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꾸만 자아가 고개를 치켜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아를 내려놓고 자아만 고집하지 않을 때, 영혼 성장을 향한 길을 걷게 된다. 영혼 성장은 평생에 걸쳐 이뤄지는 지난한 길이다.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길이다. 그 길은 한꺼번에 도달할 수도 없다. 천천히 한 걸음씩 꾸준하게 걸어갈 수밖에 없다. 느긋하게 꾸준히 걸어가야만 한다. 서두른다고 잘 도달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보다 영혼의 성장이 더딘 이한테 관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영혼이 어린 이들이 하는 미성숙한 언행으로 상처받는 일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대할 때마다 생각한다. 분명 땅을 치며 후회할 때가 올 거라고. 육체를 입고 있을 동안에는 무지 속에 빠져서 보지 못하지만, 영혼만의 상태가 되어서는 적나라하게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때, 어린 영혼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이 영혼 성장을 할 가장 좋을 기회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런 멋진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할 것이다. 기껏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후퇴를 하고 만 자신을 너무나 부끄러워할 것이다. 더 나아가 미성숙한 어린 영혼은 깨어나지 못한 에너지 상태와 어울릴만한 영혼 세상과 접속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파악하기보다 자신을 들여다보자. 내 영혼 성장도 더디고 무디다. 그렇지만 영혼이 성장할수록 점차 관대해지는 자신을 알 수 있다. 그것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식의 관대함이 아니다. 분명한 판단은 하지만, 잘 될 거라는 희망과 용기를 자신한테 주는 사랑으로 인한 관대함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라는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자신은 사랑하지 말고 타인만을 사랑하라. 맞지 않는 말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자신에게도 그러할 수 있다면, 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될 수 있다. 신은 용기와 희망을 품으며 가능성을 향해 가도록 언제나 이끌어 주고 있으므로 나한테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