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만남: 우주의 꽃, 옥빛 --- 1

by Sia


열 번째 만남: 우주의 꽃, 옥빛



라는 방긋 웃으면서 들어왔다. 잘 꾸미지 않은 수수한 라. 치자꽃 향기가 치료실에 퍼지는 듯했다. 라가 오랫동안 심각한 우울에 시달렸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라는 날마다 자살을 생각해 왔다. 일 년 전에는 정신과에 입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뭔가 달라졌다. 라도 그걸 느끼고 있을까?


-여유가 느껴져요. 조금이지만요. 아니, 어쩌면 많이 그럴지도 몰라요. 제가 원래 긍정을 업신여기는 못된 버릇이 있거든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내려갔어요. 간혹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이내 사라져요. 불안할 때마다 예전에는 신경질과 짜증을 냈었거든요. 지금은 알려주신 대로 ‘내가 불안해하고 있구나.’하고 이렇게 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진정이 되더라고요. 내가 힘들어하고 있구나. 우울해하고 있구나. 마음이 아프구나. 외롭고 고단하구나. 이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니다.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에너지 때문이다. 언뜻 보면, 내가 나를 관찰하며 참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보다 더 큰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부정감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부정감정은 속속들이 스며들게 된다. 부정감정과 하나가 된 채 뗄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곧 부정감정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대로 끌어다가 침몰시켜 버리는 것이다. 감정의 강물 밖으로 빠져나와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현재, 이 순간 이렇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한 역할을 한다. 내가 하는 것 같은데, 실은 아니다. 나보다 더 큰 나, 영혼의 중심과 접하고 있는 우주의 에너지, 또는 신이 함께 하는 것이다. 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신이 주신 인간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서다.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발견, 통제, 판단하는 정신 작용을 일컫는 ‘메타 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식에 대한 인식, 생각에 대한 생각, 타인의 의식에 대한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로 설명하자면, ‘영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보이지 않는 신이 어떤 형상이 있어서 보이는 사람을 그대로 창조하셨을까? 창세기 1장 27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면, 신도 남자 신, 여자 신이 따로 있을까? 나는 신학자가 아니지만,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신의 속성을 주셨다고. 4차원 이상의 세계를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간추려 상상해 보자. 신은 빛이라고. 이것 또한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성경의 요한1서 1장 5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빛인 신이 그 속성대로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것은 ‘빛’이고, 그 빛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보이는 육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 영혼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인간은 그 빛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육체의 눈만 부지런히 굴리면서도 마음의 눈은 감은 채 살아간다.


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내면의 눈,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을 말한다. 감정에 휘둘리고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중심을 잡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다. 풀어서 말하자면, 빛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면 어둠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 내 안에 있던 눅눅하고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게 된다. 빛은 좋은 것만 비추고 싫은 것은 피해 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감정에 동요하지 않은 채, 중심에서 다만 비춰줄 뿐이다. 그게 바로 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관심법(觀心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심법은 불교의 마음 수련법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해서 본래 자신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 자신의 마음자리’는 처음부터, 원래, 근본 등의 의미로서 천성적이고 자연적으로 지닌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의미한다. 본래면목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친 채 타고 난 불성, 불타의 본래의 성질을 뜻한다.


내가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의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껏 치닫는 마음이 진정된다. 불성이나 빛이나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다. 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는 하늘에 마음을 둔다는 것과 같다. 모든 자연 생태계가 그러하듯이 나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허투루 살 수 없다. 이왕 죽을 거니까 아무렇게나 살자고 함부로 삶을 팽개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죽음을 사색하다 보면, 잠깐 보내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놀랄 정도다. 돌아오지 않는 매 순간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러면서 또 흘러간다. 삶과 죽음이 언제나 늘 동행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아등바등할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에너지만으로 에너지만 통하는 세상으로 가는데 3차원적인 것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쥐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제대로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자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울한 생각으로 죽음의 이미지를 생각하라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제대로 떠올린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 영혼의 핵심에서 만나오던 신을 온전히 백 퍼센트로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세상에서는 신 안에서 호흡하며 신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차원이 다른 곳으로 가는 이사이고, 신 안으로 들어가는 경지다. 그곳에서 지금, 현재, 이 순간을 바라보면 감정의 강물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강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건져내어 뭍으로 올릴 수도 있다. 감정의 강물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소용돌이치며, 어디가 위험한지, 결국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그럴 때 삶의 꿰뚫어 보는 통찰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면의 중심, ‘마음의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이는 드물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비웃거나 아이들 환상 놀음이 아니냐고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 이들한테도 ‘마음의 빛’은 존재한다. 그 어떠한 악한 일을 저지른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만, 빛은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일들 때문에 많이 가려지게 된다. 그 일들이란 배신감, 좌절감, 수치감, 절망감 등등의 부정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가리고 덮는다. 그러다가 결국 처음부터 그딴 것은 없었다고 편한 대로 생각하고 만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한테 당신의 마음속에 빛이 존재한다고 하면, 대번에 썩은 미소를 날릴 것이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그 정도로 내팽개칠 것이다.


빛이 가려진 것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과도 같다. 원래의 하늘빛이 보이지 않지만, 하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늘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고 나면, 본래의 모습 그대로 하늘이 나타난다. 그것처럼 ‘마음의 빛’은 무수한 일들로 인해 가려져서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다. 가리던 것을 들추고 벗기게 되면 ‘마음의 빛’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게다가 그것은 도미노 현상처럼 일어난다. 한번 벗기면 덩달아 벗겨내기 쉬워져서 이내 빛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마음의 빛’을 되찾는 것은 ‘자각’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스스로 깨닫는 것, 자각은 지금, 현재,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 이 작업은 우주의 에너지나 신과 하나가 되어 영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깊고 원숙하게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 곧 ‘마음의 빛’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된다.


화가 났구나. 기분이 상했구나. 우울하구나, 이렇게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우주의 에너지나 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이나 우주의 에너지와 합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신이나 우주의 에너지를 받게 된다. 여러 부정에너지에 휩싸인 상태에서 벗어나 에너지가 확장되고 정화된다. 마음을 하늘로 보내고, 신과 접합하는 마음의 중심을 알아차리는 것이 습관이 된다면, 내면은 긍정 에너지로 선순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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