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시치료에서의 ‘빛’

by 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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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지만, 지금 말하려 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여기에 관한 글을 써보지 않았다. 그 언저리를 더듬는 글은 많았지만, 분명하게 여기에 주제를 정해서 펼쳐 놓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금기를 지킨 것이 되었는데, 이제 둘러쳐진 금줄을 떼려고 한다. 어설플 수 있는 이 시도를 하려는 이유는 어떤 자극 때문이다. 누군가 심상 시치료(Simsang-Poetry Therapy)에서의 ‘빛’을 엘랑 비탈(élan vital)과 연결 지었고, 그렇게 한 자신의 안목을 스스로 높이 산 듯해 보였다. 애초에 엘랑 비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그 말을 듣고 그냥 넘기려고 하다가 호기심이 발동했다. ‘엘랑 비탈’이라? 그것과 어떻게 맥락이 같을 수 있단 말이지?


그 말을 처음 들은 그날 저녁나절에 고개를 저었다. 심상 시치료에서의 빛과 엘랑 비탈이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검색해서 안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서 베르그송의 책, ‘웃음’,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탐독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확신이 굳어졌다. 앙리 베그르송의 이론과 심상 시치료가 달라서였다. 몇 군데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주장하는 철학은, 보다 겸손하며 스스로 자신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하려는 능력을 지녔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지성이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가르쳐준 바와 같은 지성이 아니다. 인간적 지성의 기능이란 공허한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는 일도 아니고, 돌아서서 눈부신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도 아니다. 지성이 할 일은 그와 다르다. 우리는 소처럼 중노동을 하도록 붙들어 매어져 자신의 근육이나 관절의 움직임, 쟁기의 무게와 흙의 저항을 느끼고 있다.”-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차원적 이동의 관점이다. 그 깨달음은 오로지 영성으로 이끌어지는 지성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베르그송은 ‘동굴의 비유’를 지성을 폄하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치부하며 오만하게도 다음 글에서 ‘지성’을 극대화한다.




“당신의 의식 속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지성이다. 당신은 자신의 사고 속에 있으며, 그 사고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성은 진보하는 힘이 있다. 지성은 더욱 명석하게 수많은 사물을 볼 수 있으리라고 말해도 괜찮다. 그러나 지성을 그려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의 기원을 더듬는 일에도 역시 지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에서-




단언컨대, 지성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진정 달을 만나는 것은 의식을 뚫고 나간 의식이며, 지성을 해체해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뤄진 영성이다. 생의 철학자인 그가 이원론적으로 주장하면서 강조했던 ‘생명’과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보는 심상 시치료적 일원론적 관점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글의 요지가 좀 빗나간 것 같지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이다 보니 이렇게 전개하고 있다. 이쯤에서도 여전히 ‘엘랑 비탈’을 옹호하는 그분은 팔짱을 낀 채 물어볼 것도 같다.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죠? 도대체? 그냥 같다고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달라도 아주 다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진화에는 복잡성과 개체성을 증대시키는 지속적인 충동이 존재하며 그는 이 충동을 ‘엘랑비탈(생의 비약)’이라고 불렀다.

통합 예술‧문화 치유인 심상 시치료는 감성과 감수성으로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여 온전한 영혼을 이루게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며, 2011년에 공식적으로 학계에 발표된 정신 심리치유이다. 심상 시치료의 핵심 개념이 ‘빛’인데, 이 빛은 인간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마음의 정점에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게다가 고유한 인간의 특성, 인성과 개성을 나타나는 ‘빛깔’이 있어서 저마다 다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삶이란 이처럼 자기만의 개성을 발휘하고 나누고 누리면서 타인과 세상과 함께 번져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빛을 품은 인간이라는 뜻에서 라틴어 인간 학명인 ‘호모(Homo)’와 라틴어 ‘빛’을 일컫는 ‘룩스(Lux)’를 합해서 ‘호모룩스(Homo Lux)’라고 인간을 새롭게 명명하기도 했다. 이 ‘빛’은 모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그 빛은 신 혹은 우주의 에너지와 함께한다. 그러니, 이 빛은 주어진 삶을 자신답게 살 수 있게 하고, 죽음 이후의 생(사후생)에서도 육체를 벗고 함께 할 빛이라고 믿고 있다. 삶이란 육체 안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잠깐 육체 안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빛’은 당연히 목숨이 있는 동안 생명을 활성하게 하는, 베르그송식으로 말하자면, 엘랑 비탈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숨이 멎은 다음에는 오롯이 그 ‘빛’만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되는, 그래서 영혼만 갈 수 있는 높은 차원에서 제대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빛’을 ‘생명의 빛’, ‘마음의 빛’, ‘내면의 빛’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은 ‘진화’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 ‘진화’는 생물이 생명의 기원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변해 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분히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삶 이외의 ‘진화’에 대해서는 베르그송은 언급한 바가 없다. 침묵의 금기를 잘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지극한 삼차원 안에서 ‘진화’에 발을 맞춘 역동적 개념이 ‘엘랑 비탈’이라면, 심상 시치료의 ‘빛’은 차원을 벗어나서 ‘영혼’에 주파수를 맞춘 영성적 개념이다. 한마디로 심상 시치료의 ‘빛’은 ‘엘랑 비탈’이 아니다. 심상 시치료에서는 ‘진화’가 아니라 ‘영혼의 성숙과 성장’에 목적으로 두고 한 걸음씩 자신의 안으로 내딛는 것이 ‘삶’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게다가 삼 차원적 시각에서 보자면, 지극히 퇴보적이어서 진화의 반대 방향에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보다 높은 차원, 신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우주적 질서일 것이다. 인간의 삶은 ‘진화’가 아니라 ‘성장’과 ‘조화’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엘랑 비탈’이라는 말과 심상 시치료의 ‘빛’을 나란히 놓고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마시길 바란다. 이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든 그분한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혼란스럽지만, 이마저도 감사함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나저나 사후에 생이 있는지, 빛이 그곳까지 가는지 어떻게 아냐고 내게 따진다면, 나는 베르그송이 강렬하게 등장시킨 ‘직관’을 넣어서, 바로 ‘직관이 닿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베르그송은 ‘관념 철학자’였지만, 심상 시치료의 ‘빛’은 관념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라고 답할 것이다. 빛을 알아차리는 자만이 빛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도 덧붙이려고 한다. 빛나는 인생은 너무 쉬워서 너무나 어려울 뿐이다. 심상 시치료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마음의 빛을 찾는 여정’이다.




-2025. 9. 14. 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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