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음악의 변주처럼
언제나 사회는 개인에게 보편성과 특별함을 동시에 요구한다. 사회적 규율 속에서 정해진 일정대로 하루를 살아가고, 시기마다 이루어야 할 것들 -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길러내는 길고도 험한 과정 - 을 꾸준히 각인시켜 줄 미디어들에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안정된 삶을 위해서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회사에 오래 앉아 있음으로써 내 가치를 남들과 비교해서 증명하는 과정 또한 요구된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 속에서 사람들은 보편성과 특별함에 개인적 해석을 곁들이게 된다. 모두가 돈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보편성으로 인식하고 남들보다 특별함을 돋보이기 위해 트렌드를 소비하거나 SNS에 개인의 사생활을 인위적으로 공유하면서 각자의 즐거움의 영역에 투자하게 된다. 다만 존재 가치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외부적 요소들로 인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내면을 구성하는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잊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인용해 그 가치들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
1) 삶은 끝없는 우연성으로 이루어져 서사를 형성한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중략)…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2) 꿈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여는 열쇠이다.
꿈은 커뮤니케이션 (암호화되긴 했지만) 일뿐 아니라 미학적 활동, 상상력의 유희이며, 이 유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다. 꿈은 상상하는 것, 없는 것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욕구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바로 그 점이 꿈속에 철면피한 위험이 은폐된 이유이기도 하다.
3) 모티프는 삶에 복수적 의미와 넓은 공명을 준다.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새로운 체험은 보다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4) 이데올로기는 음악, 예술, 소설 등 미적 요소에 끈질기게 점철되어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훼손한다.
그때 그녀는 공산주의 세계란 이러한 음악의 야만성이 군림하는 유일한 곳이라 생각했다. 나라 밖으로 나가 보았을 때, 그녀는 음악의 소음화가 인류를 총체적 추함이라는 역사적 단계로 밀어붙이는 세계적 과정임을 확인했다. 추함의 총체적 성격은 우선 도처에 편재된 음향적 추함으로 발현되었다. 자동차, 오토바이, 전기 기타, 파쇄기, 확성기, 사이렌. 시각적 추함의 편재도 이에 뒤질세라 나타났다.
5) 내면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내밀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존재 가치의 상실이다.
진리 속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부정적 정의는 쉽다. 거짓말하지 않기, 본심을 숨기지 않기, 아무것도 감추지 않기다. …(중략)…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6) 가장 단순한 질문, 대답 없는 질문들이 지닌 가치를 보자.
그렇다면 테레자와 그녀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녀의 육체는 테레자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육체에 이런 권리가 없다면, 그 이름은 무엇과 관계되는 것일까? 오로지 비육체적이며 비물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테레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7) 직업적 소명도 그저 사회적 압박이 낳은 목적의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그는 사진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고 그것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는 내면적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 (그때까지 항상 동정했던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다.
8) 시와 은유가 곧 삶이다.
뇌 속에는 시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해서 우리를 매료하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기록되는 모양이다. ….(중략)…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9) 자아의 경계를 넘어 인간 삶을 연구하는 것이 소설의 가치이다.
…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니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중략)…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샅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 (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탐사하는 것이다.
10) 역사와 개인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인정하자.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며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가장 고상한 비극과 가장 일상적 사건이 이토록 현기증 날 정도로 근접한 것일까? … 근접성이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일까? 그렇고 말고. 북극이 남극에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한다면 지구는 사라질 것이고, 인간은 현기증 나는 진공 속에 놓여 추락의 유혹에 빠질 것이다.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 가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키치’라는 개념은 우리의 정신을 관통하는 사회적 영향력과 신념의 가벼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인간은 사소한 계기로 믿음을 형성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곤경에 처했을 때 가톨릭 신자들에게 돌봄을 받고 신앙심을 발견하듯. 감사함으로 그런 결심을 했듯 인간적인 결심이란 끔찍할 정도로 쉬운 것이라 얘기한다.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중략)… 좌익을 좌익답게 하는 것은 대장정의 키치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키치의 정체는 정치 전략이 아니라 이미지, 은유, 용어로 결정된다…. “카터 대통령”, “우리들의 전통 가치”, “야만적 공산주의” 같은 단어는 미국적 키치의 용어에 해당하며 대장정의 키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은 신념에 더해 이를 증명하기 위한 외부의 시선에 의존하게 된다. 자신을 보는 내면의 거울이 없기에 우리는 타인을 통해 감정이라는 통로로 자신을 이해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그리고 나를 깊은 감정으로 느끼는 가족이나 친구들, 미약하게나마 감정을 공유하는 동료와 주변의 스쳐가는 인연 등. 우리는 그 범주와 강함 정도를 구분하고 나의 거울을 찾아 무용한 일들에 힘을 쏟고 내 존재에 무거움을 더해 현실을 느끼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두 번째 범주에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그리고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끝으로 아주 드문 네 번째 범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다. 사랑하는 이와 같이 기상을 하고, 퇴근길에 가벼운 전화를 한 뒤에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 하는 것.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나와 연결 짓는 행복. 그리고 주말엔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지겨워질 즈음 괜스레 장난치며 유치한 몸짓으로 서로의 관심을 구애하는 것. 이러한 전원시는 관계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 농담은 반복된다 해도 그 재미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전원시의 맥락에서는 유머조차도 반복의 달콤한 법칙에 따른다.
슬픔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상정한다는 것. 사랑하는 이를 잃고 그의 부재를 경험한 시절 속에서 시간의 빈 공간을 끝없이 채워나갔지만 내면의 한편에는 산소가 닿지 않아 늘 시큰거리는 추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비극적 사건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소중함과 관계에서 오는 사소함의 가치를 통찰과 치유의 미학으로 바라보게 된다. 고통을 딛고 슬픔이라는 차분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공포는 하나의 충격, 완벽한 맹목의 순간이다. 공포에는 모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결핍되어 있다. 오로지 우리가 기대하는 미지의 사건이 내뿜는 광폭한 빛만 보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슬픔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상정한다. 공포의 광채는 휘장에 가리고, 우리는 전보다 세상을 훨씬 아름답게 만드는 푸르스름하고 부드러운 빛 속에서 세상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