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죽음이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삶의 부조리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치밀한 묘사와 서스펜스적인 스토리로 구성한 작품이라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어떻습니까? 나는 인생에 기댈 언덕이 있다고 하는 교육 방법이, 도무지 미덥지가 않은데……”
“뭡니까. 그 기댈 언덕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없는 것을 말입니다,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환상 교육이죠…… 그래서, 모래가 고체면서도 유체 역학적인 성질을 다분히 갖고 있다는 점에 아주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중략)…
“아니, 내가 모래를 예로 든 것은…… 결국 세계는 모래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모래는 정지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 본질을 파악할 수가 없으니까…… 모래가 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유동 자체가 모래라는……
…(중략)…
나 자신이 모래가 되는……모래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한번 죽으면, 더 이상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어지니까……” -95p.
<모래의 여자>를 읽고 나서 세상을 폐쇄된 유리병으로 상상해보니, 그속에서 뒤엉킨 냄새가 서로의 코를 찌르며 예민함으로 반응하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남들보다 후각능력이 예민한 이들은 타인의 영혼에서 풍기는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산의 영도라는 지역에서 바다에 둘러싸여 자랐건만, 한번도 그 비릿함과 축축하게 내 피부에 눌러앉은 습기에선 지독한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생활패턴이 단번에 들키는 것은 각자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나는 시큼 달달한 냄새였다. 타인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내 정신의 깊은 곳을 찌른다.
어린아이들에게서 나는 구수한 아몬드나 갓 구운 빵냄새 같은 달콤한 향기를 더 이상 맡을 수 없는 어른들...
택시 기사님들과 자주 어울려서 술모임을 하는 삼촌에게선 뒷골목 국밥의 육수 우리는 냄새와 택시의 오래된 벨벳 시트의 퀴퀴한 냄새가 동반됐다. 미용실 작은 이모에게선 염색약 냄새와 미용실 협탁에 배치해 둔 매니큐어 냄새, 그리고 싸구려 향수의 냄새가 은은히 뒤섞여 있다.
영혼이 가장 퀴퀴하게 찌든 소위 잘 나가는 사업가들과 증권회사의 어른들에 비교하면, 노량진으로 향하는 9호선 급행 전철에 짓이겨진 출근길 시민들의 땀냄새는 무척이나 인간적이다. 과장된 호흡과 맹렬하게 허공을 향하는 위선자들의 시선은 사회적 강화 학습의 결과물로 탄생한 그들의 영혼이 점차 죽어가고 있으며, 그들이 풍기는 냄새는 불편한 위협감마저 감돌게 된다.
영혼이 죽은 자들이 풍기는 냄새는 그 진원지를 알지 못한 채 스멀스멀 올라오며 점점 일반 시민들과의 교류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엘리트주의 집단으로 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일생동안 수차례 죽음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릴 때, 불공정한 사회에 저항하지 않을 때, 돈의 맛에 흥분할 때. 영혼의 죽음이라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일들은 타인에게 상처와 폭력, 불합리한 횡포와 전쟁을 일으킨다. 자신의 영혼을 돈과 권력의 힘에 굴복하고 중독된 채 서서히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 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다,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쉼 없이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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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노동을 극복하는…… 그 자기부정의 에너지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입니다.” -150p.
모래속에 갇힌 준페이와 모래의 여인처럼 우리의 삶은 도망치려고 한들 허무함의 연속이지만, 삶이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기에 주어진 삶 속에서 자기 실현을 통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찾아내고 잠재우는 의식이 필요하다.
아직 영혼의 따뜻함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선 된장국처럼 구수하지만 가슴 저릿한 어린 시절의 추억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