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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정 Sep 21. 2024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

알랭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나서

콘텐츠와 서비스의 물질화

네이버 등 서치 플랫폼의 첫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기사들은 그야말로 국민정서를 속물적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다. 커뮤니티를 통해 젊은이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고 중년 여성들은 물질주의에 빠지며, 직장인들은 블라인드나 대기업의 사내 커뮤니티를 통해 노동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쫓을 뿐이다. 

커리어 코칭, 결혼정보회사, 중고플랫폼 등으로 사람 간의 교류조차 자발적 움직임이 허용이 되지 않는다. 어려운 취업문과 근로환경으로 인해 중요한 인생의 타임라인은 서비스와 재화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기준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언론은 매일 유명인들과 정치인들의 시시콜콜한 행보를 전하는데, 그런 같잖은 기사들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 어떻게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예인과 기업가들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라도 버리고 대신 보통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더 초점을 맞추어만 준다면 지위에 대한 불만 또한 얼마나 많이 줄어들겠는가. - : 34p. 참고



온라인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의 삶은 사람들과의 만남조차 돈 없인 어려운 실정이다. 강도 높은 근무환경과 늦은 퇴근 시간은 동료 간의 대화보다는 회사를 잊을 수 있는 이질적인 집단을 찾아 인위적인 환경이더라도 우리를 문화생활의 무대로 옮겨 놓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이처럼 사람들과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 서비스 비용을 치르게 된다. 예로, 넷플연가, 시도플레이스, 틴더 등 데이트앱과 커뮤니티 플랫폼을 통해 유료 서비스로 만남조차 물질화되어버렸다.


자본과 과학기술을 부리는 능력으로 엄청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계급 (현시대의 기업가들) 은 오직 부에만 관심을 가졌다. 감상을 배제하는 공리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은 직원을 탐욕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으며, 그들의 가족을 배려하지 않았고, 아픈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어린아이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다.또 사람들은 대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이곳에서는 경쟁적이고 바쁜 분위기 때문에 이웃 간 정이 파괴되었다.

…(중략)…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거벗은 자기 이익,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아무런 유대도 남겨두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열정, 기사도적 열의, 속물적인 감상주의의 드높은 환희를 이기적인 계산의 차가운 물에 담가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적 가치를 녹여 교환가치를 만들어냈다. - 139p. 인용



비극의 필요성

언론과 미디어의 콘텐츠를 벗어나 장편 소설을 읽고 비극을 맞이한 주인공의 삶에 동화되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다양한 해석과 감수성을 지니게 한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고 나면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중략)…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또한 독서를 통해 내면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1) 라캉의 거울단계론에서 유아기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제어하거나 

2) 레비나스의 이포스타즈론에서 불면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고 꿈으로 입장하는 형태로의 ’ 자아‘를 생성하는 큰 사건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내면의 세계를 구축하고 판단력을 기르는 활동이기에 비극을 읽고 주인공의 삶에 대한 연민과 괴로움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 ‘고 말하지 않았다. 또 ’ 부자가 돼라 ‘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 독립적으로 살라 ‘고 간청할 뿐이다.” _샹포르



지배계급의 관념에서 벗어나 나만의 세계와 가치로 연결하기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실제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걸까?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 정신을 갖추고 있다 해도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는 능력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고 전제한다. 우리의 정신은 만족을 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외부의 목소리의 영향력에 민감하다. 이런 목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내는 작은 소리를 삼켜버리고, 긴요한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방해할 수 있다. -259p.


러스킨은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이 부유해지는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271p.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279p.


빅토를 위고는 <에르나니 Hernani>(1830)의 서문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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