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나는 욕심쟁이입니다

아무렴 어때. 내 욕심인데.

by 아무나작가 이율희

2015년, 미국에서 골드만삭스를 퇴사하고, 돌연 쿠팡에 입사했다. 당시 한국은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고, 쿠팡은 위메프나 티몬보다도 인지도가 낮았다. 친구들도, 동료들도, 심지어 엄마까지도 모두가 반대했다.


아무렴 어때.
나는 파워 P, 아주 충동적인 사람이다. 그럴싸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내 성향 탓을 해버린다. 쿠팡에서는 '프로덕트 오너(Product Owner, PO)'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미니 CEO’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멋진 직무였지만, 실상은 개발 조직과 비즈니스 조직을 오가며 조율하고 팔로업하는 풀타임 조정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잡부.


아무렴 어때.

원래 CEO도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 아닌가?

모두가 반대한 이직이었고, 경력의 대전환이었기에 그게 미니 CEO든 잡부든, 어쨌든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야심가, 야망 PO.' 나는 그저 내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고, 다 함께 잘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고, 그저 욕심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 게 불편했다.


어느 날, 나보다 10년 선배인 PO가 밥을 먹다 말고 말했다. “율PO님, 대충해요. 적당히 해야 오래가요~”


나는 외쳤다.

왜 대충하죠? 뭘 하든 최선을 다해야죠.
왜 적당히 해요?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해야죠.
왜 오래가야 하죠? 전 굵고 짧게 경력 쌓고, 박수칠 때 떠나고 싶은데요.

정말 크게 외쳤다. 속으로만... 현실의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밥을 삼켰고, 얼굴만 시뻘개졌다.


아무렴 어때.
언젠가는 내 진심도, 내 의지도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욕심 많은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돌아보면 나는 분명 욕심쟁이였다. 그것도 꽤 야심 찬 욕심 덩어리. 그리고 그 욕심은 내 커리어의 강력한 연료가 되어주었다.


나는 언제부터 '내 안의 욕심'과 마주했을까?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이름 석자에 대한 욕심

학창 시절, 나는 내내 평범한 학생이었다. 영어는 3등급, 국어는 4등급.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고, 늘 똑부러지고 공부 잘하고 예쁘기까지 한 언니 옆에서 그냥 착하고 긍정적인 아이었다. 장래희망 칸에는 대부분 '고민 중'으로 채웠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상사에 별 욕심이 없었던 덕분에, 그 시절의 평범한 나 자신에 대해 별다른 불만도 없었다는 점이다.


수능을 망치고, 점수 맞춰 대학이나 가야겠다 싶던 차에 아빠의 제안으로 BYU-Hawaii에 지원하게 됐다. 우리 똑순이 언니가 있는 학교였다. 첫 토플 점수는 120점 만점에 무려 49점. 3개월 안에 점수가 안 나오면 안 보내겠다는 아빠의 엄포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내 기준엔 대학교를 가는 것이 평범한 것이었으므로. 두 달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고, 간신히 커트라인인 87점을 받아냈다.


이제 부모님의 잔소리에서 해방이다! 외치며 신나게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웬걸. 모두가 날 이렇게 불렀다.

"이OO 동생", "OO’s Sister"

졸업을 앞둔 언니는 이미 학교의 유명인사였고, 나는 그저 ‘누군가의 동생’이었다. 그게 싫었다. 평범해도 내 이름 석자만큼은 특별하다고 믿었기에, 나는 이율희로 불리고 싶었다.


"언니를 따라잡자."


언니에 대한 혼자만의 라이벌 의식이 생겼다. 그게 내 욕심의 시작이었다. 공부에 몰입했고, 장학금을 받았고, 학교 곳곳에서 점점 내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언니의 졸업이 더 큰 역할을 했겠지만.

나는 4.0 만점에 3.9점 이상에게만 주어지는 최고 학업상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로 졸업했다. 사실상 언니 덕분이나 다름없다.


내 이름 석자가 공신력 있는 서류에 또렷하게 남았던 첫 순간이었다.


낭만에 대한 욕심

하와이는 분명 지상의 낙원이었지만, 생활은 불편했다. 버스는 40분에 한 대. 시내 한 번 다녀오려면 반나절이 걸렸다. 오빠들에게 차를 얻어타는 게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그게 어느 순간부터 부담스럽고 싫어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차를 사야겠다."


당시 여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었고, 적당히 굴러다닐 만한 중고차는 2천 불(한화 약 250만원)이면 살 수 있었다. 문제는 허락이었다. 안된다고 할 것이 뻔했기에 신입생 수업인 'English Writing'에서 배운 '논리적 사고법'을 활용해 아빠에게 제안서를 써서 보냈다. 제목은 ‘차를 사야 하는 5가지 이유’.


이변은 없었다. “절대 안 돼.”

이렇게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너무 쉽게 거절당했기에, 의욕도 꺾이고, 수업도 빠졌다. 그때 룸메이트가 말했다. “야, 그냥 사. 아빠가 수업 빠지는 것도 모르시는데, 차 산 건 어떻게 아시겠냐?”


유레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날 바로 중고차를 샀다. 내 첫 차, 뷰익. 이름도 지어줬다. ‘빅맨’. 20만 킬로를 달린, 계기판도 고장난 낡은 친구였지만, 빅맨과 함께 내 세계는 넓어졌다. 어디든 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이 자유를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었다. 낭만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다.

돈에 대한 욕심

초등학교 4학년, 부모님이 이혼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더는 싸우는 걸 안 봐도 되니까.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자식이 셋이나 되니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끝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언니는 바빴고, 4살짜리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만만한 내가 엄마와 아빠 사이의 메신저가 되어야 했다. 아빠에게 돈 얘기를 전하고,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 역할이 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돈이라는 놈이 정말 싫었다. 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대학 생활 끝 무렵, 아빠가 말했다. “휴학하는 건 어때?” 그 말에서 깨달았다. 내 자유와 낭만은 철저하게 부모의 부담 위에 놓여 있었다는 걸. 그 순간 결심했다.

이 지긋지긋한 돈.
내가 먼저 잡아버려야겠다.
돈이란 놈을 소유하고, 완전히 이겨버려야겠다.


돈에 대한 욕심은 내 삶의 많은 선택을 단순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하나씩 기회로 이어졌다.

그래서 파이낸스를 전공했고, 첫 직장은 골드만삭스였다.

21살에 해외 주식을 시작했고, 내 자산은 해마다 20%씩 늘어났다.

28살엔 갭 투자로 오피스텔을 샀다. 비록 나는 전세에 살지만, 동시에 월세를 받는 임대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욕심쟁이다

돌아보면, 대학 시절의 4년은 내 안의 ‘욕심’을 제대로 마주한 시간이었다.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욕심

낭만을 누리고 싶었던 욕심

돈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욕심


욕심이나 야망이라는 말은 흔히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욕심 내면 벌 받아", "지나치면 안 돼"라는 말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당연한 듯 통용되지 않는가.

나 역시 그랬다. 욕심 많은 사람을 보면 ‘왜 저렇게 티를 내지?’ 싶었고, 야망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겸손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욕심은 부족함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그걸 채우기 위해 더 해보겠다는 마음이다. 어쩌면 일정 선까지의 욕심은 가장 겸손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선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 나를 따라다녔던 '야심가', '야망 PO'라는 말이 불편했던 건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단어에 붙은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땐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욕심쟁이였고, 그 욕심은 내 커리어를 이끌었다.


다시 돌아가도 욕심을 낼 것이다.

대충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굵고 짧게, 나답게 커리어를 쌓을 것이다.


아무렴 어때. 내 욕심인데.



당신은 언제, 어떤 욕심과 마주했나요?

그 욕심은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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