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일하는 당신이 손해 보지 않으려면
첫 직장은 미국 유타주에 있는 골드만삭스였다.
운 좋게 입사했고, 묵묵히 일했다.
주어진 일은 열심히, 티는 안 나게 했다.
그런 나와 달리,
주변엔 ‘자기PR’에 진심인 동료들이 많았다.
역시 다른 종자인가,
아니면 미국과 한국 교육의 차이일까.
작은 일도 큰 성과처럼 포장해 말하고,
마치 칭찬받을 타이밍을 노리듯 들썩였다.
낯설었다. “왜 저렇게까지?”
시선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어색했고,
겸손하게 묵묵히 일하는 게 프로라고 믿었다.
그런 나를 불러 세운 사람이 있었다.
우리 부서의 Vice President, 뉴요커 Kibwe.
훤칠하고, 스타일 좋은 멋쟁이 신사였다.
갑자기 그가 회의실로 부르던 날,
솔직히 겁이 났다. 뭐 잘못했나 싶어서.
Kibwe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Impression is everything.
보여지는 인상이 전부야
당황한 얼굴을 읽었는지,
Kibwe는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Yul, everyone knows you’re smart and hardworking, and we really appreciate that. But you also need to be intentional about the impression you leave. Sometimes, that’s everything.
율, 네가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는 건 다들 알아. 그리고 우린 그걸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너에 대한 인상을 의도적으로 남기는 것도 정말 중요해. 어쩌면, 그게 전부일 수도 있어.
정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고 배워왔던 나에게
‘보이는 게 전부’라는 말은 너무 반대였다.
Kibwe는 내 용모도 언급했다.
Look at your outfit. It looks like you’re working from your couch at home.
네 복장 좀 봐봐. 집에서 소파에 앉아 재택근무하는 사람처럼 보여.
그날 나는 털기모 고무줄 바지에
유니클로 후리스를 걸쳐입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화장기라곤 1도 없었다.
Kibwe는 말했다.
Even if you don’t meet clients, you should still show up like a professional. Being professional isn’t just about what you say or do—
it’s also about how you appear.
비록 우리는 고객을 직접 만나진 않지만, 그래도 프로처럼 보여야 해. 프로페셔널하다는 건 말과 행동만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야. 겉모습도 중요하지.
집에 돌아와 곱씹었다.
그 말이 뭘 의미했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느꼈는지.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변했다.
1:1 미팅에서 내가 지난 2주간 무엇을 했고,
어떤 성과를 냈고, 무엇을 개선할 건지,
A4 한장 분량으로 정리해서 말했다.
예전엔 매니저가 물어보면,
그저 성실히 답을 하던 나였다.
PPT 한 장도 공을 들였고,
사소하더라도 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화장도 어색하지만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포멀한 옷을 챙겨 입었다.
불편했던 시선은 익숙해졌고,
익숙해진 시선은 나를 조금씩 바꿔놨다.
그리고 깨달았다.
보여지는 모습은 단순히 '겉'이 아니라,
내 태도와 의도,
존재감을 담는 '프레임’이라는 것을.
그 이후 커리어 내내,
Kibwe의 말은 나를 이끌었다.
내가 한 일,
우리 팀이 해낸 일,
동료가 잘한 일을
의도적으로, 전략적으로 드러냈다.
예를 들어 쿠팡에서는
냉정한 결과 중심 문화에 맞춰
성과와 개선점을 분리해 공유했고,
팩트 기반의 피드백을 명확히 남겼다.
무신사에서는
과정과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에 맞춰
성과뿐 아니라, 함께한 동료를 강조했다.
때로는 거슬리게 들린다는 피드백도 받았다.
심지어 블라인드에 나와 내 조직에 대한 글이
핫 이슈가 되기도 했다.
‘니네만 일하냐, 정치질 그만해라’는 글에
서로 논쟁하는 1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뻤다.
내 인상이,
우리 팀의 존재감이
확실히 각인됐다는 뜻이었으니까.
어쩌면,
1~2년마다 승진하고
최연소 임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초년 시절, 뭣도 모를 때 들었던,
Kibwe의 조언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묵묵히 일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드러내야 보인다.
보여야, 기회도 온다.
내가 배운 겸손은,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해낸 일을 왜곡 없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
그건 잘난 척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존재감이다.
나는 지금도 묵묵히 일하는 조직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한다.
Impression is everything.
누군가가 당연히 알아줄 거란 착각은 금물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를
'인식시키는 것'도 당신의 일이다.
그게 바로,
프로의 책임이다.
겸손하게 묻히는 것과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
당신은 지금, 어디쯤 서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