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공부 좀 했다는 내가, 에세이 한 문제를 빼먹고 떨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누군가가 시키지 않은 공부를 스스로 열심히 해봤다.
현직 연구자 시절, 보고서나 논문을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건 익숙했지만,
아이 엄마로 살아가는 지금은 하루 10분 영어 스피킹 연습조차 힘든 날이 많았다.
그런 내가 다시 꽤 진지하게 공부하게 된 계기는 Certified Cicerone 시험이었다.
Certified Cicerone는 Cicerone 프로그램의 두 번째 단계이며,
맥주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감각, 실무, 언어까지 전방위적 역량을 요구하는 시험이다.
크게 시음과 실기 파트와 필기시험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필기시험은 약 4시간 동안 영어로 치러지며, 객관식, 주관식, 그리고 두 개의 장문 에세이로 구성된다.
전체 평균 80% 이상, 시음과 실기 파트는 70% 이상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다.
문제는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향미를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특히 비영어권 응시자에겐 이 감각의 언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큰 장벽이 된다.
감각은 몸으로 느껴도, 시험은 말로 증명해야 하니까.
Certified Cicerone의 전 세계 평균 합격률은 약 35% 이하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미국 변호사 시험보다도 낮은 수치다.
현재 한국에는 약 50명 정도의 자격 보유자가 있으며,
그 이상의 상위 단계는 아직 국내 보유자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험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절대 쉽지 않은 시험이다.
이야기가 길었다.
어쨌든 나는 ‘왕년에 공부 좀 해본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영어 논문도 썼던 유학 경험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낙관 속에서
이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대충한 건 아니다.
아이들이 숙제하는 저녁 시간, 식탁 한쪽에 나도 책과 프린트를 펼쳐놓고 함께 공부했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싫어하지 않았다.
혼자 공부하는 게 억울했었는데, 엄마도 절절매며 공부하는 걸 보며 위안을 얻는 눈치였다.
시험을 치루기 직전, 방문을 닫으려 할 때 아들은 말했다.
“엄마, 꼭 문제 끝까지 다 읽고, 빠뜨리지 말고 풀고 나오세요!”
그 말이, 그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을 줄은 몰랐다.
Certified Cicerone 필기시험에는 배점이 큰 장문 에세이 문제가 두 개 나온다.
나는 한 문제를 풀면서, “어? 이번엔 에세이 하나만 나왔네?” 하고 느긋하게 글을 썼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제출 버튼을 누르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
시험 종료 30초 전, 두 번째 에세이 문제의 존재를 발견했다.
아들 앞에서 내가 늘 했던 그 잔소리.
“끝까지 문제 다 읽고 푸세요.”
그 잔소리를 내가 어긴 것이다.
시험을 보면서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었다.
“흠, 이 정도면 붙지 않을까?”
하지만 그 마지막 에세이 문제를 단 두 단어만 쓰고 화면이 꺼지는 순간,
모든 자신감은 무너졌다.
Certified Cicerone 응시료는 결코 저렴하지 않다.
이 한순간의 실수로, 30만 원이 넘는 시험료는 바사삭 부서졌고,
내 멘탈도 함께 부서졌다.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엄마, 시험 붙었어요?”
아들은 종종 그렇게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 미국에서 채점 결과가 안 나왔네~” 하고 얼버무린다.
아직은, 엄마라는 우주가 크게 보이는 나이이기 때문에
그 조심스러움이 무거운 진실을 가볍게 포장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말해야겠다는 확신이 든다.
“엄마도 떨어질 수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해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걸 아프게 지나간 다음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게 진짜 공부고, 진짜 어른이라는 걸,
엄마가 먼저 보여주고 싶어.”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지 두 달이 지났다.
당연히 바로 재시험을 보는 게 가장 효율적일 텐데,
아직은 다시 준비할 에너지가 나지 않는다.
재도전의 의지는 남아 있지만,
손이 책을 펼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내 안에 살짝 번아웃이 왔다는 뜻이겠지.
지금은 그냥 이 실패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는 중이다.
이 글은 브런치북 시리즈 「나는 비어소믈리에가 되기로 했다」 중
5편 /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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