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햇살언덕은 아이들에게 몸을 맘껏 쓰게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오르막을 올라가는 일이건, 내리막을 내려가는 일이건, 그리고 넓은 잔디밭을 힘껏 뛰어다니는 일까지 오늘 하루 써야 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가는 것이 햇살언덕에서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뛰어노는 아이가 있으면 얌전히 앉아서 노는 아이도 있다. 오늘 여자 아이들은 입고 온 겉옷을 넓게 잔디에 깔아놓고 일찌감치 눕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누운 아이는 아가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맛있는 것(의 역할을 할 것 같은)을 찾아서 들고 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오늘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할 건지 궁금해져 근처에 앉아 슬쩍 지켜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의 주머니 안에서 솔방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탕 사 왔다.”
“이거는 돈이라고 하자. 내가 더 많이 주워올게”
아이들이 펼친 상상 보따리마다 다른 솔방울의 용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놀이는 금세 솔방울 모으기 놀이로 변화되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주변에 심어놓은 소나무들마다 오래된 솔방울들이 쌓이고 쌓여 아이들이 모아도 산이 될 정도로 많았다. 슬슬 주변을 둘러볼 요량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다 보니 솔방울을 줍느라 아이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졸참나무 상수리들도 보였다. 열매가 작아서 특별히 신경 쓰고 보지 않으면 안보이기 때문에 솔방울을 모으는 애들에게 슬쩍 주운 상수리를 건네주었다. 열매가 반질반질하고 귀엽다 보니 아이들도 맘에 들었는지 하나 둘 상수리를 찾아 주머니에 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이왕에 줍기 시작한 거 주변 고추밭에도 가보았다. 텃밭에 아직 뽑지 않고 그대로 둔 고춧대에 늦게서야 열린 작은 고추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또 한 번 여자아이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역시나 여자 아이들은 고추를 보자마자 신나게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자신은 매운 거를 잘 먹으니 가져가서 먹겠다며 자기 자랑을 빼먹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익어서 빨개진 고추며, 특별히 작아서 귀엽게 생긴 고추들을 각자의 놀이 계획에 맞춰 아이들은 신나게 고추를 땄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과는 다른 계획을 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온 만물이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때이다. 추운 계절을 버티기 위해 어떤 것들은 작은 알로, 또는 애벌레로 자신을 최소화시키기도 하고, 움직임을 멈추고 동면에 들어가는 아이들도 있다. 식물들도 번식을 위해 여러 생존전략을 사용하는데 먹히거나, 붙어 이동하거나, 날리거나 하는 방식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아이들은 여러 해 동안 터전에서 지내며 다양한 생물들의 겨울나기를 자연스럽게 경험했다. 나방 애벌레의 딱딱한 겨울 집을 발견하는 날도 있고, 사마귀의 거품집을 찾아내기도 했다. 오늘 나들이길에 모은 것만 해도 솔방울, 졸참나무 상수리, 고추가 있으니 가을을 갈무리하는 시점에 아이들과 함께 씨앗을 모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내려가는 길에 나팔꽃 씨앗을 모을 수도 있고, 아이들 옷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꼬마리를 뜯어도 되고, 심지어 오늘 오전에 간식으로 먹었던 감에서 나온 씨까지 모아놓으면 양이 꽤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내려가는 길에 나팔꽃 씨 좀 따야겠다.”
“그걸로 뭐할 건데요?”
“내년 봄에 나비(교사 별명) 텃밭에 심을라고. 우리 저번에 꽃물 염색할 때 나팔꽃 너무 예뻤잖아.”
아이들은 적극 대찬성이다. 우리 아이들의 피 속엔 태초의 수렵 본능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채집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고, 심자고 하면 더욱 좋아한다. 길가다 마음에 드는 풀을 발견하면 뽑아다가 마당에 옮겨심기까지 하는 녀석들이다. 내가 심어보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아이들은 이미 마음이 급하다. 내려가면서 나팔꽃 씨를 받는 것 외에 주변 텃밭에 굴러다니는 씨알 작은 고구마를 줍기도 하고, 밭에 곱게 눕혀놓은 옥수숫대를 뒤져 마른 옥수수를 뜯어오거나 콩을 수확하고 땔감으로 쓰려고 모아놓은 듯한 콩대더미 속에서 콩꼬투리들을 요령껏 잘도 찾아 나오기도 했다. 씨앗과 열매는 모으려고 보니 넘치고 넘쳤다. 돌콩, 결명자, 찔레 열매, 도깨비 가지, 도깨비바늘... 교사의 그만 돌아가자는 말은 수집욕 강한 아이들 앞에서 빈 메아리로 내게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아이들과 씨앗을 담아둘 종이상자를 접었다. 아이들이 *습식수채화를 하고 모아놓은 종이들을 잘라다가 상자를 만들었다. 아직 손길이 서툰 아이들의 수채화는 그냥 두고 보면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것들이지만 모아두었다가 이런 식으로 활용하면 색종이보다 훨씬 활용도도 좋고 예쁘기까지 하다. 아이들 여럿이 함께 만드니 종이상자도 금방 만들어졌다. 나들이 때 주운 여러 씨앗과 열매들을 조금씩 담아보았다.
“잘 말려 놓으면 내년에 바로 심을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잘 보살펴주자.”
잘 보살펴주자는 말은 마법의 주문이다. 아이들은 잘 보살펴주자는 한마디로 행동도 조심스러워지고 마음씀도 다정해진다. 아마도 하루에 한 번씩은 자신들이 모아놓은 씨앗들을 살펴보느라 모아놓은 상자 앞에서 잠깐씩 시간을 보내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교실에서 더러는 소란스럽게 뛰어 다니던 아이들도 보살펴야 할 대상 앞에선 이렇게 한없이 다정해진다. 그게 마법이지 무얼까. 이렇게 보살펴진 것들이 다시 만날 이듬해 봄에 푸른 풀과 예쁜 꽃이 되어 들판으로 번져 나가면 아이들의 보람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문득 행복해진다. 작은 것들을 이렇듯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온 세상을 넉넉하게 품을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젖은 종이에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물 번짐을 이용해 색의 농도를 조절하고 색 번짐을 이용해 종이 위에서 색을 자연스럽게 섞어가며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