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놀이
햇볕이 너무도 좋은 날이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교사의 마음은 아이들을 나들이길로 재촉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오늘따라 마당에서 놀고 싶단다. 아이들에겐 사실 마당만큼 재미있는 곳이 없다. 마당은 아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처음 터전을 방문하는 아이들도 이곳의 공간과 주변 사람들에 낯설어하다가도 모래놀이터에만 데리고 가면 언제 내가 낯설어했나 싶게 자리 깔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마당은 모든 아이들이 첫 놀이를 시작했던 곳이다. 또는 휴일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가족들이 아이들과 터전에 와서 마당에서 놀고 가기도 한다. 마당은 매일 만나는 놀이터이고, 가장 익숙한 놀이터이기에 아이들에겐 마당이 가장 좋은 놀이터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이럴 땐 교사의 욕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마당엔 모래밭이 있다. 2살 아이도 좋아하고, 졸업을 해서 다 큰 아이들도 좋아하는 곳이다. 모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놀잇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놀이를 시작하면 그만하고 가자고 하기 전까지 무한정 놀 수 있기도 하다. 모래라는 놀잇감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똑같이 주어지는 놀잇감이지만 누가 가지고 노느냐에 따라 놀이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처음 모래놀이를 하며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생일 케이크이다. 밥그릇 같은 용기에 흙을 담아서 그냥 엎었다가 그릇만 빼면 완성된다. 아이들이 생일 케이크를 좋아하는 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가장 인상 깊은 이벤트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 어디서든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옆엔 생일 케이크가 있다. 진짜 생일잔치에서는 주인공만 촛불을 불 수 있지만 역할놀이에선 누구나 촛불을 불 수 있다. 기분이 좋으면 교사도 촛불 끄기에 동참시켜준다. 혼자서 끄는 촛불보다 여럿이서 끄는 촛불이 훨씬 즐겁다. 게다가 생일 땐 촛불을 한 번밖에 못 끄지만 놀이에서는 만족할 만큼 수십 번이라도 촛불을 끌 수 있다. 그러니 매일 케이크를 만들고 촛불을 불어 끄는 것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케이크를 만드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케이크는 좀 더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여자 아이들은 마당 주변에 난 들꽃들을 꺾어다가 케이크를 장식한다. 그냥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매우 미적으로 뛰어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더욱 예쁜 케이크가 될지 궁리하고 시도하면서 마침내 스스로가 만든 아름다운 창작물들을 교사에게 뽐낸다. 나는 항상 아이들은 본능에 가까운 태초의 인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아이들의 작품은 태초의 인류가 토기에 빗살을 그려 넣었던 이유와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름다움을 모방하거나 창작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발현해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모래놀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과는 ‘두껍아, 두껍아’ 놀이를 시작하는데 처음 모래의 촉감이 낯설어 쉽게 모래를 손등에 쌓지 못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한 번 만져보게 되면 빠져나오기 힘든 매력이 있어 손등에 올려놓는 것 뿐 아니라 쥐고 둥글리고 뭉치며 다양한 놀이를 시도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모래놀이가 익숙지 않아 모래를 쥐고 흩뿌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모래를 던지기도 해서 옆에 앉아 놀이 방법을 계속 알려주어야 한다. 심지어는 모래를 입속에 넣어보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랬던 아이들도 탈 나지 않고 건강하게 잘 크는 것을 보면 옛 어른들이 '흙도 먹고 그래야 건강하게 자라지'라고 했던 말씀들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모래놀이는 아이들 연령이 높아질수록 한층 규모 있어진다. 규모 있는 놀이를 위해서는 협동 작업이 필요하다. 수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구멍을 파는 아이, 물을 길어다 나르는 아이, 돌멩이 등을 찾아서 주워오는 아이, 심지어 별 것도 아닌 이 일을 진두지휘하는 아이도 있다. 협동놀이하면 또 역할놀이이다. 요즘엔 캠핑을 다니는 가정도 많아 걸핏하면 모래로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인다. 가끔 ‘여보, 냉장고에 맥주 좀 가져오세요.’ 하는 아이들을 보며 한바탕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도 있었다.
물론 무계획으로 노는 아이들도 있다. 모래밭에 가서 눈에 보이는 냄비를 가져다가 흙을 퍼담아 채우고 붓는 일을 반복하기도 하고, 체를 가지고 와서 모래를 넣고 계속 흔들어 아주 가는 모래와 작은 돌멩이를 분리하며 놀기도 한다. 어떤 아이들은 크고 넓적한 돌멩이를 하나 가지고 와서 땅바닥의 모래를 계속 갈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매우 가늘고 고운 흙이 만들어져서 만지고 놀기에 꽤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그렇게 가는 흙을 만들자면 꽤 오랫동안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해서 소음이 여간하지 않고, 바람이 조금이라도 부는 날이면 그렇게 가는 모래가 사방으로 날아다녀서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이 놀이를 시작하면 옆에서 교사는 적당히 만들도록 조절해주어야 하는 놀이이기도 하다. 때로는 이런 반복적인 동작이 마법과 같아서 멈추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 아이들이 한정 없이 돌을 가지고 모래를 갈고 있을 땐 가끔 모른 척해주기도 한다. 이런 결과물들은 매우 곱고 부드러워 나조차도 어디 쓸데도 없는데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아이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이렇게 놀이에 푹 빠져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서 교사는 시계를 잘 보고 있어야 한다. 점심 먹는 시간을 훌쩍 넘겨버릴 수 있다. 오늘도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며 놀이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매일 이렇게 놀아도 그만 놀자고 하면 다들 아쉬워한다.
“밥 먹고 또 나와서 놀아도 돼요?”
마당에서의 놀이가 끝나면 아이들은 항상 이렇게 묻는다. 뭐가 어렵겠는가. 놀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니 밥 먹고 나서도 놀고, 자고 일어나서도 놀고 계속 놀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나도 이렇게 매일매일 놀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순간은 너희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