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낳은 아이를 신생아 중환자실에 덩그마니 넣어두고 할 일 없이 서성인다. 울다, 자책하다, 멍하다가 문득 배가 고프다면, 꼭 뭔가를 먹어야만 한다면, 사과가 제일 말이 됐다.
중환자실에 아이를 넣어두고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파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때, 그렇다면 나는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허전함 때문이었는지, 정말 배가 고픈 것인지, 본능인지 당장 먹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방금 아이를 낳은 산모 따위는 하나도 중하지 않다. 나도 내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사과다. 나를 위해 뭔가를 끓이거나 조리하거나 깎거나 닦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것. 뭔가를 먹어야 한다면 사과다.
엊그제 3킬로로 세상에 나온 아이는 콧줄로 공급되는 약물만으로 연명을 하는데, 그래서 하루하루 몸무게가 몇십 그람씩 빠지고 있는데 아이 엄마는 제 배 고프다고 병원을 빠져나간다. 모성, 참 무기력하다. 그래도 사과라면 덜 미안할 것 같다.
마침 나가려는데 간호사가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는 아이 엄마를 보더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한마디 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저 아이는 죽은 아이인가. 엄마는 살 사람이고 저 아이는 죽을 아이인가. 산모 걱정을 해주고 돌아서는 간호사 뒤통수에 대고 그게 할 말냐고 붙잡고 묻고 싶다. 차마 입은 못 떼고 뜨거운 콧김만 씩씩 내뿜으며 간호사가 방금 나간 문만 노려본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
사실은 이 와중에 배가 고픈 것이 들킨데 대한 무안함이다. 그렇게 펑펑 울더니 이내 먹을 것을 찾는 본능을 들켜버려서다. 그 무안함이 밖으로 나오며 화로 승화되었다. 분명 나를 향하고 있는 분노인데, 그 분노가 나와 접전하는 모든 이들과 모든 사물에 전가된다.
화가 나는 건 배가 고파서 그렇다. 배고픔과 분노는 일말의 연결 고리도 없다. 그러나 뭔가 이유가 있으면 타당성이 생긴다. 배가 고파서 화나는 것으로 하자. 그러면 잠시 내가 조금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화가 나는 건 내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난 원래 이렇게 까지 모나거나 후진 사람이 아닌데 배고파서 그런 걸로 한다. 사과가 시급하다.
애초부터 사과를 사러 간 것은 아니었다. 병원과 연결된 마트에 들어서자마 과일 코너가 제일 먼저 보였다. 겨울 사과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 부사와 가장 비슷한 워싱턴 후지, 달지만 껍질이 두꺼운 레드 딜리셔스, 무난한 갈라, 시디 신 초록 그래니 스미스, 신맛이 없이 단맛만 나서 밍밍한 맥킨토시, 색깔만 예쁜 엠파이어… 예쁘게 진열된 사과 중에 새로운 새로운 사과가 보인다. 허니크리습 Honeycrisp. 핑크와 노랑과 빨간색이 적절히 섞여 묘하다. 이 세상것이 아닌 듯 투명하고 귀하다.
허니 크리습을 봉지 한가득 샀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소파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치 전투를 앞두고 총알을 잔뜩 준비해둔 것처럼 든든하다. 먹으려고 허벅지에 슥슥 문지르고 사과를 보니 맨질맨질 반드르르한 게 먹음직하다. 이 와중에 먹음직하다고? 아이가 나온 건 맞나? 지금 내가 슬프고 있나? 현실감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사과를 베어 문다. 껍질이 과육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분명 껍질채 먹었는데 껍질이 입안에서 겉돌지 않는다. 씹는 내내 껍질과 과육의 가름이 입안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 목구멍을 내려가는 한 입까지 과육이 탄탄하다. 단짠이 아닌, 단신맛 밸런스가 절묘하다. 이게 무슨 맛이지? 맛이라고? 맛? 내가 사과 맛을 느낄 때인가? 맛있다고 느껴도 되나? 현실감이 없다.
처음 먹는 예쁜 사과 이름과, 내 안에도 내 옆에 없는 아이와, 오늘 생전 처음 들은 모든 의학용어가 사과를 와그작와그작 베어 무는 소리와 함께 머리 안에서 한데 섞여 빙빙 돈다. 씹어도 허니크리습 사과의 과육과 껍질이 분리가 되지 않는다. 대충 씹어 넘기니 목구멍으로 넘어갈때 식도가 아프다. 텅빈 배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덜 씹힌 탄탄한 과육과 껍질이 내장에 상채기를 내며내려간다. 씹어도 분리되지 않는 껍질과 과육처럼, 아이와 내가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