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보호소의 밍키가 죽었다. 나는 그 애를 그리 예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죽음은 외롭다. 삶이 외로울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견 보호소 아이들의 죽음은 다른 반려견들의 죽음에 비해 외로울 확률이 훨씬 높다. 아프면 치료를 받고,마지막까지 가족들 곁에서 보낼 수 있는 대다수의 반려견들과 달리, 보호소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손이라도 잡아줄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의 많은 유기견들은 사람을 피하다 제 때 치료받지 못해 죽거나, 다른 심각한 아이들에게 가려져 있다 죽은 채로 발견되는 등 열악한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다. 환경 자체도 충만하지 않은 터라, 유기견들의 죽음을 볼 때마다 그들의 삶과 죽음 전반에 걸친 고독이 사무치게 다가오곤 한다.
밍키는 늘 설사를 하는 아이였다. 다만 설사를 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늘 기운이 넘치던 터라 다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많이 아픈 아이들 병원비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봉사자들을 탓할 수 없다.) 폭설이 지나간 저번 주말에도 정말 활발했는데, 월요일부터 식음을 거부하더니 화요일 봉사자분에게 죽은 채로 발견되었단다.
앞서 말했듯, 나는 밍키를 그리 예뻐하지 않았다. 늘 발에 설사가 범벅이 된 채로 반갑다며 나에게 뛰어왔는데, 말로는 예쁘다 하면서도 슬쩍 피하게 되곤 했었다. 참 부질없는 짓이었다. 똥 좀 묻는 게 뭐라고.
유기견 보호소에서만큼은 이기적인 나를 내려놓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주고 싶은 게 아닌, 그들이 바라는 도움을 주겠다고. 나를 사랑하고 아끼듯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 다가오는 아이를 품어주지 못했고, 겨우 봉사 몇 시간으로 생색을 내며 아이들을 편애했다. 내 이기심과 밍키의 죽음은 무관하지만, 밍키가 진 외로움의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수요일 봉사를 마치고, 밍키와 같은 견사를 썼던 뽀이에게 인사를 했다. 밍키처럼 묽은 변을 본지 오래 된 뽀이를 쓰다듬으며,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라고 부탁했다. 기왕 태어난 거 사랑 받으며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염치 없지만 힘내서 끝까지 살아남아달라고 했다. 원래 사람만 보면 안아달라고 뛰며 우는 아이가 오늘은 조용히 머리를 내밀었다. 얘도 뭘 아는걸까. 떠난 밍키에게도, 남은 뽀이에게도 미안해서 조금 울었다.
부디, 오늘은 어떤 죽음도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