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의 빛에 관한 그림들
“빛이 있어라.”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태초의 인간이 누구였는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성경에 따르면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말씀은 빛이 되고 어둠이 됩니다. 말씀은 하늘이 되고 물이 되고 땅이 되고 바다가 되고 식물과 나무가 되고 해 달 별이 생기고 시간과 계절이 흐릅니다. 물고기와 새가 만들어지고 이윽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말씀은 사람이 되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은 나고 자라 죽기를 반복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여서 나고 자라 죽기를 반복합니다. 다른 점.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점. 다른 존재들과 특별히 다른 수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하나는 그리는 것입니다. 순간의 이미지를 붙잡아 다른 누구에게 보이려 애쓰는 생명체는 인간 말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생명체도 각자의 방식으로 소통하기는 하지만요. 그림이라기에 차이가 있잖아요.) 그 그림은 나의 가족 혹은 동료에게 전달되고 수 만년의 시간을 지나 현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수천 세대 이전 누구의 아버지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우리의 조상이 남긴 그림. 기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을 어느 동굴에 새겨 넣은 인류. 그 사람은 어째서 왜 그리기 시작했을까요.
피해만 다니던 거대한 짐승에게 물려 죽을 뻔한 딸을 구해내고 창을 들고 맞서 싸운 용감한 사나이의 이야기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승리의 쾌감에 온몸의 세포가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다면 그 위대한 승리의 희열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까. 마을을 괴롭히던 포식자를 사냥함으로 축제가 열리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동료들이 안전하고 희망차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까. 나는 침대에 누워 그녀가 보내준 그림들을 휴대폰 화면으로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화면을 쓸어내리며 이미지를 따라 시선을 옮깁니다.
그녀의 그림은 잘 그린 그림입니다. 이 설명은 어떤 미사여구보다 정확하다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세상에 빛을 보고 자각을 갖기 시작한 이후로 내가 본 그녀는 항상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40년이 넘었으니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녀는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짓궂은 아이들이 도화지로 만족하지 못하고 흰 벽지가 탐이나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눈을 피해 사고를 친 아이는 하얀 벽면에 자기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그려놓았습니다.
엄마. 아빠. 언니. 동생. 그리고 자기 자신.
난쟁이 펼쳐진 벽지를 뒤늦게 발견한 엄마는 ‘하이고 못 산다.’ 하며 화를 내려다가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에 그만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 버립니다. 그리고 벽화로 남겨진 그림을 함께 감상하기 시작합니다. 엄마는 아빠로 추정되는 인물의 뾰족 튀어나온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거는 뭐고?”
“엄마는 그것도 모르나? 꼬치다 꼬치!”
아이는 해맑게 웃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거라 사실과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엄마는 그때 단박에 아이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좀 더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첫 학원으로 주산학원을 보내주었습니다. 미술은 배우지 않아도 잘 그리니까요. 아마 아이가 골고루 잘하는 사람이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이는 그림만 잘 그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림 말고 다른 것도 잘합니다. 영어 통역과 번역, 미술평론, 전시 기획까지 잘하는 게 많지만 그림실력이 압도적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는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것을 적어달라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게 될 때는 항상 마음속에 주저함이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니. 문맹률이 1프로에 가까운 나라에 살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소개는 제대로 된 예시가 아닌 것 같아서요. 수치화시키면 이런 거죠. 안녕하세요. 저는 99%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며 나를 소개합니다. 글을 잘 쓰기 때문이려나 하고 생각해 봤지만 세상에는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쓴 글은 내가 좋아하는 글일 뿐 잘 쓰는 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해서 제가 내린 결론은 글을 쓸 때에 나를, 내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 그림으로는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것을 10%도 못해내기 때문인 거죠. 그렇게 생각해 보니 조금은 명확해졌습니다. 가수는 노래를 댄서는 춤을 배우는 연기를 화가는 그림을 그렇게 각자의 도구로 자기를 표현하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녀의 첫 전시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이후로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전시를 했고 나는 그 수많은 전시의 절반 이상은 직접 가서 그림을 봤습니다. 여중 여고시절부터 대학원 미국 유학까지 그녀의 대소사 지난한 인간관계들까지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년이 넘는 긴 시간 그녀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까이서 작가와 작품의 역사를 지켜본 결과 그녀는 언제나 한눈파는 일 없이 작업에만 몰두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이제는 그 누가 봐도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바라보며 가끔 생각합니다.
“대체 이건 왜 그린 거야?”
저는 우연한 기회가 닿아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의 거실에 걸려있는 군인 두 명이 그려져 있는 그림입니다. 작가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그린 그림으로 전쟁기념관에서 전시를 했었고 전시가 끝나고 서울에 살고 있는 제가 철수를 시켜 보관하고 있다가 모종의 거래로 제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볼 때마다 작품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대체 왜 이런 군인을 그린 걸까 하는 의문이 가라앉지가 않습니다. 특전사, 해병대, 수색대, 특공대, 등등 약간의 검색만으로도 무수히 멋있고 용맹한 군인들의 이미지가 넘치는데 왜 하필 누가 봐도 훈련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유약해 보이는 군인 두 명을 그린 걸까. 내 식대로 좋은 해석을 붙이자면 이런 다수의 평범한 군인들이 지켜낸 나라라는 걸 강조한 건 아닐까. 하지만 작가의 말을 들어보진 못했으니 그건 알 수 없는 일이고 미학적으로 보자면 더더욱 이 두 사람보다는 더 멋있는 군인이 많았을 텐데요. 멋있는 군인을 그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더더욱 그런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대체 왜 이건 왜 그린 거야?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무얼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에 대해서도 이 글은 “무엇”입니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평론? 에세이? 소설? 편지? 그 어떤 카테고리에 묶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제 생각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가진 수단 중에 제일 온전히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이 도구로 대체 이건 왜 그리는 거야? 하는 의문의 해답이 되는 근거를 서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평론이라면 응당 그리 하여야겠죠.
그녀의 그림을 들여다봅니다. 긴 시간 동안 변화해온 그녀의 오브제. 인형 해골 묵주 성모상 난민 꽃제비 의자 도자기 빛으로 점철되어 있는 그녀의 그림을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거기에는 빛이 있었고 빛을 보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느꼈습니다. 그녀가 만들어 낸 빛 앞에 근거를 찾을 깜냥도 되지 않을뿐더러 근거는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에 굳이 이유가 필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녀와 그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빛을 그리고 싶고 그 빛을 주고 싶었다고. 이 얼마나 신과 같은 마음씨입니까. 어쩌면 하느님이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정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이유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림을 그만두지 않았을까. 감히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개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