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힘들다

화가의 자의식-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by 김윤경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변화는 힘들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회화’라는 개념 자체에 집중한 화가이다. 회화란 그림 외부에서의 어떤 결정 과정의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 팽팽한 많은 담론이 존재한다. 회화가 보다 형식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지 내용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의 작품은 온통 회화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벤데이 도트(Benday dots), 산업적 이미지 등 그의 그림이 너무도 매끈해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림 속엔 온통 ‘회화’에 대한 자의식이 묻어 있고 결과는 그 결정의 산물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붓끝이라는 본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의 작품을 새롭고 강한 것으로 만든 이유 중 하나는 1960년대의 새로운 형식들이 복잡함, 모호함, 그리고 실존적 드라마 등으로 대두되는 보다 오래된 형식들을 가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오랜 형식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의미가 코드화되어야 하는 독재주의의 붕괴에 관한 것이었다.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 벤데이 도트로 구성된 평면적 화면, 과장된 윤곽선과 인쇄물처럼 보이는 색면 처리 등 그는 회화가 마치 인쇄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회화의 경계를 뒤흔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에게 그림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지극히 ‘붓질’의 정의와 행위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내 그림은 붓질(brushstroke)에 관한 그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회화의 가장 전통적이고 감성적인 요소인 ‘붓질’을 차갑고 기계적인 형식으로 모사하는 행위, 즉 그는 붓질을 하지 않음으로써 붓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전형인 거대한 붓질을 흉내 내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계산된 선과 도트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붓질의 제스처를 모방함으로써 그 제스처를 낯설게 만들고,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은 표현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그의 그림에는 격정도, 작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흔적도 없는 듯하지만, 그 무표정한 표면 뒤에는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유머가 깔려 있다. 그는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림’에 대해 말했고, ‘기계적’으로 보이는 형식을 통해 ‘회화성’을 되묻는다.

그의 작업은 결국, 회화가 붓과 캔버스를 통해 구축하는 시각적 언어가 얼마나 관습적이고 상대적인지를 드러낸다. 리히텐슈타인의 냉정한 도트와 패러디는, 회화의 감성적 기원에 대한 일종의 헌사이며, 동시에 그 기원의 탈신화화 작업이기도 하다. 이제 회화는 그러한 형식으로부터도 많은 변화를 이루어냈지만 여전히 화가의 자의식과 ‘붓질’이라는 본능 사이에는 오랜 집착이나 방해의 요소가 내재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렇듯 예술에서도 ‘변화’란 어렵기 마련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은 1960년대에 매니 파버(Manny Faber)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회화사의 거물들이 했을 법한 ‘자기 비평’ 혹은 ‘자기 검증’이란 개념의 분명한 구체화였다. 즉 그가 바라던 자유는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의 양식 자체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지난 수 백 년의 미술의 역사를 은밀히, 빠른 속도로 거쳐 또 하나의 형식을 발견해 내는 결론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우리 시대, 예술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복제의 재생산의 불가피함 속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윔피(Wimpy)는 이제 우울한 하나의 트로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속으로 끊임없는 탈출을 시도하며 늘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영역으로 찾아 들어가려 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태도는 거의 장인에 가깝다. ‘붓질’이라는 본능을 고수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그림 속 화가의 자의식을 발견하려는 많은 관객에게 그의 화가로서의 여정은 여전히 큰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화가, 미술번역가 김윤경

우는 소녀(Crying Girl, 1964)

붓질(Brushstroke, 1965)

미키(Look, Mickey, 1961)

정물(Still-life after Picasso,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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