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손춘익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

by 김윤경

손춘익 ‘그들이 사는 세상‘


‘그들이 사는 세상’은 꽃을 그리는 손춘익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붙인 제목이다. ‘그들’은 꽃을 의미할 것이고 그림은 우리 인간과 다른 질서를 갖는 꽃의 체계의 형상화에 관한 것이다. 동식물, 사물 등의 의인화는 미술이나 문학 등 많은 예술의 형식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또한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것은 이미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의 범주가 다양해지고 어느덧 우리는 반려동물이나 식물도 가족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 하며 이렇게 그들을 의인화하는 우리는 모두 그들과 더불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일부이다. 작가가 그러한 식물을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복잡한 문명의 간섭을 받지 않는 체계에 대한 동경, 자연에 순응하며 자유로이 피었다 지는, 일견 연약한 그들의 삶이야말로 어머니와도 같은 대자연에 의탁하는 삶이며 인간이 만드는 문명보다 더 큰 ‘섭리‘에 의한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손춘익 작가의 그림에는 이러한 식물의 의인화만큼이나 흥미로운 특색이 또 있는데 그것은 그가 쓰는 회화적 기술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사진의 색감이나 구성을 따라 하는 사실주의를 구사한다. 포토 리얼리즘(Photorealism)을 떠올리기 쉬운데 포토 리얼리즘이 팝 아트(Pop-art)로부터 진화한 것이고 추상미술(Abstract art)이나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예술 형식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가 사진의 틀 속에서 구사하는 다소 아카데믹한 전통적인 유화 방식은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처럼 보이는 그림‘에도 여러 종류가 존재한다. 모든 부분이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사진처럼 보이는 그림도 있겠지만 사진의 기술 중 하나인 아웃 포커싱(Background blur) 기법의 모방이나 어두운 부분의 광택이 두드러지는 인화지 효과를 그림에서 재현한 듯 어딘가 초기의 칼라 사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의 그림은 팝 아트의 진화로 나타난 포토 리얼리즘의 세련된 느낌과 거리가 멀다. 재료의 사용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가 채택한 유화의 방식, 즉 초벌칠을 할 때 테레핀(turpentine)이나 린시드 오일(linseed oil)을 어두운 색의 유화 물감과 섞어 채색한 뒤 점차 밝은 색의 순서로 층을 만드는 고전적 서양화에 입각한 방식을 고수하며 그는 오히려 사진처럼 보이는 표면 위 두터운 물감의 존재감을 통해 회화의 정통성에 대해 강조한다.


초기 사진가들이 회화적 전통, 특히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들의 구성을 따라 했다는 점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그 당시 사진은 기술적 기록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회화의 권위를 빌려야만 예술로 진입할 수 있었다. 사진 초창기인 19세기 중반, 초상 사진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초상화처럼 인물을 중심에 두고 정면 혹은 3/4 측면으로 앉히는 구도를 따랐다. 손을 책 위에 올린다든지, 배경에 커튼이나 기둥을 넣는 식의 연출도 회화의 전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이런 형식은 당시의 초상화에서 각광받던 시각 언어였고 초기 사진가들 또한 그것의 모방을 통해 자신들의 사진이 익숙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화가들이 구성과 조명을 고민하듯, 초기 사진가들도 빛의 방향, 의상의 질감, 인물의 표정까지 세심하게 연출했다. 사진이 기계적으로 찍히는 게 아니라 ‘예술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걸 강조하려 했으며 하나의 예술의 장르로 인식되게 하기 위한 단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사진가들은 점점 회화적 형식에서 벗어나 사진만의 고유한 시각 언어를 찾기 시작했지만 초기 사진가들에게 사진에 나타나는 회화적 터치는 중요한 화두였다. 사진작가 줄리아 마가릿 카메런(Julia Margaret Cameron)은 사진의 뽀얀 흐림이나 순간성 자체를 감성적으로 활용했는데 이는 렘브란트(Rembrandt)가 자신의 그림에서 강한 단일 광원, 어두운 배경, 진지한 표정을 쓴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의 사진에서 인물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키려 빛을 한 방향으로 비추고 어두운 배경과 흐릿한 경계를 사용하여 부드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좋은 예이다.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등 18세기 영국 귀족 초상을 그렸던 화가들이 책상, 기둥, 커튼 등의 소품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는데 남북 전쟁 시대의 인물 사진으로 유명한 매튜 브래디(Matthew Brady)가 비슷한 소품과 자세를 취한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이 예술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회화의 형식을 모방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오랜 역사를 거치며 숭고미로 인식된 것이든 보다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미감에 의한 것이든 사진이 또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라파엘로(Rafaello Sanzio)를 비롯하여 성모자상과 같은 종교화를 많이 남겼던 화가들이 즐겨 쓴 피라미드형 구도나 색감을 19세기 가족사진뿐만 아니라 현재의 가족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장르나 기술의 진보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보편적 미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현대의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는 카메라와 튜브 물감의 발명으로 인해 회화가 재현에서 추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시대로부터도 더욱 멀리 진화했다. 매일매일 인터넷에 업로드되는 수많은 이미지들, 총천연색으로 조작되는 광활한 사막과 바다의 사진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배경 음악과 특수효과까지 동원해서 만드는 중동지역의 다큐멘터리 영상물 등은 우리가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세상은 기술의 편리와 풍요를 누리게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는 등 부작용을 겪게 한다. 회화는 어쩔 수도 없이 시각적 결과물이지만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면서 회화의 의미는 더욱더 무모하고도 은밀한 개인주의의 산물이 되어 간다.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를 넘어 AI로부터 불륜 사실을 고발하겠다는 협박을 받는 시대에서 예술을 통한 인간성 회복은 의미심장한 과제이다.

손춘익 작가의 화폭에 담긴 꽃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준다. 어린 시절 앞산 전망대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던 사진사 아저씨, 똑같은 유치원복을 입고 달성공원의 모자상 옆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던,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친구들 틈의 우리 자신 등 컬러 사진이 귀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가 그의 작품에 존재한다. 매끈하고 세련된 다른 극사실주의의 꽃이나 과일 그림에서 느낄 수 없는 그러한 정감은 해가 저무는 노란 하늘을 뒤로하고 지고 있는 코스모스, 어두운 습지에서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는 중인 것만 같은 에델바이스, 넓은 들판에서 인사를 건네는 듯한 국화꽃 등 그들의 시간이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과 다를 것이 없다는 데에 기인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꽃들의 생생한 모습은 우리에게 생명과 생존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고전인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꽃잎 하나하나에 담긴 세밀한 묘사와 자연광의 표현은 작가의 탁월한 관찰력과 회화적 감각을 드러내며, 관객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배경을 흐리게 처리하여 꽃들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며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식물의 재현을 넘어, 계절과 생명, 빛과 어둠 사이의 감정적 교차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자연 속의 작은 존재가 지닌 존엄성과 영속성을 일깨우는 그의 그림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이 속세의 순간들이 자연에 귀의하여 대화하는 조용하지만 깊은 사색의 순간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한 동안 시든 꽃을 많이 그리기도 했던 작가가 꽃들에게 붙여준 이름인 ’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초상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의미의 ‘환멸‘을 경험한 자만이 겸허한 마음으로 신께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듯 세파를 다 이기고 노을 진 하늘을 등 뒤로 한 채 서 있는 코스모스는 우리의 생이 짧고도 찬란하다는 것, 그래서 하늘을 향하고 살 것을 이야기한다. 사진의 기법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느림의 미학, 금방 시들고 마는 여린 식물을 정성껏 그리며 인생은 덧없이 지나간다는 것을 경고하는 바니타스(Vanitas) 화가들처럼 작가는 우리가 보다 경건해야 할 것을, 헛되기에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을 담담한 필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화가, 미술번역가 김윤경

손춘익, 그들이 사는 세상-국화, Oil on canvas, 65x53cm,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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