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면을 통해 바라본 '처음'과 '시작'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처음'이라는 각자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처음이 설렘의 표상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직 처음 글을 적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 경험에 빗대어 생각하기보다는 보편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문제의 '원인' 혹은 '발단'을 찾게 되는데요. 그것 또한 문제 발생의 '처음' 혹은 '시초(始初)'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처음'과 '시작'을 언급한 이유는 삶을 살아가면서 요즘 중요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예를 들어보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모두 유익한 관계도 아니고 모두 유해한 관계도 아닙니다. 모두 사적인 관계도 아니고 모두 공적인 관계도 아닙니다. 특히나 복잡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어쩌면 관계형성을 강요받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고, 학교를 다니고, 심지어 무언가를 배우러 가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만약에 n명의 사람의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n명의 사람들은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고, 각자의 사정을 전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보이는 행동의 양상을 보고 자기 자신이 편하자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도를 넘어서면 나는 선(善)이고 너는 악(惡)이라는 형태로 생각을 하게 되겠죠? 그리고 거기에 n명의 사람들 중 우두머리나 상위집단의 포식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선(善)과 악(惡)을 정해서 상위집단이라는 사람들이 하위집단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위집단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왜 위의 예시를 들었을까요?
상위집단이 강요하는 폭압적인 보편성의 강요는 하위집단에게 '처음'에 '시작'을 하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게 지금 현재의 세상이고 특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거기에 상위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요즘 말하는 '내로남불'을 몸소 실천하면서 하위집단에게는 계속 강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게 법이고, 우리 집단에서 그렇게 정했으니 따르라."
그러면 만약에 이렇게 '시작'부터 잘못된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연령대에 맞게 새로운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괴롭힘에 대한 '시작점'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고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영유아기에는 어른의 조력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유아기의 집단생활에서 상위집단이라고 해봐야 사고능력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이에게 새로운 '시작점'을 찾아주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동기에는 조금 세부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기준으로 본다면 저학년(1~3)과 고학년(4~6)으로 생각해 봐야겠죠? 저학년은 앞의 영유아기처럼 어른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저학년 시기에는 보통 행동의 가부(可否)를 결정하거나 자신이 행동을 했을 때 어른들이 체벌을 가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고학년 시기가 되면 본격적으로 자신의 행동 기준이 생겨서 어른이 개입을 해도 비행(非行)을 하는 아이들이 생기게 되는 게 현실입니다.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4~6)부터 또래집단의 괴롭힘 그리고 인간적 차별이 벌어집니다. 여기에서 또 가끔 선택을 잘못하는 선생님들이 생기게 되는데요. 학부모들의 이성이 마비되는 상황에 선생님의 이성까지 마비가 된다면 또래집단에서 뒤처지는 어린이들은 말 그대로 집단에서의 생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아이가 만약 정말 괴로워하고 있다면 극단적이지만 새로운 '시작점'을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기(중학교 1학년 ~ 고등학교 3학년)가 되면 또래집단의 괴롭힘의 강도나 방법이 굉장히 고도화가 되고 흔히 뉴스나 청문회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해자의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이 되어있고, 가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서 사람을 망가뜨렸는지 조차 모른다."
그리고 괴롭힘을 가해하는 학생과 더불어 입지가 불안한 선생님들이 상위집단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하위집단을 희생시키거나 특정한 학생 하나를 완전히 인격적으로 말살시켜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괴롭힘을 더 부추기면서 자신은 상위집단의 학생들과 관계를 공고히 하는 선생님들도 존재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대학진학을 하는 학생들이 있고 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지만 분명히 괴롭힘은 존재합니다.
왜 첫 번째 이야기부터 주제가 '시작'인데 껄끄러운 '괴롭힘'에 대한 문제를 꺼내느냐고 이야기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처음'에 '시작'을 하고 싶은데 이러한 괴롭힘 때문에 시작도 못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우리 사회에는 많이 있고, 그러한 괴롭힘 때문에 과거에 갇혀서 아예 시작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처음 글을 적으면서 '괴롭힘'이라는 불쾌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집 밖에서 남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나요? 상사로서 부하직원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면 선생님인데 학생을 들들 볶고 있지는 않나요?
인간 각자의 상황은 다르기 때문에 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저도 오늘 글을 적는 '처음'에 '시작'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 방법으로 살면서 타인의 '시작'을 방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처음' 그리고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처음'과 '시작'에 대해서 생각할 때 어떤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