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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m Apr 02. 2024

두 번째 :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의 수첩

20년 전의 수첩에 적힌 책임감과 처절함

첫 번째 이야기에서 조금 어두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어떤 부분을 생각해 보면 좋을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많이 밝아지는 것 같지는 않으나, 일단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시간이 일단 오래 지났네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가까운 분의 수첩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 카메라가 흔한 시절이 아니라서 수첩 주인 분의 허락을 받아 필름 카메라로 촬영을 했습니다.


거기에 적혀있는 그대로를 여기에 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글을 적을 때는 수첩에 적힌 내용을 조금 수정을 했는데, 다 적고 생각해 보니 굳이 수정할 필요 없이 현시대에도 충분히 배울만한 문장들이었거든요.


1) 학생들에게 절대로 체벌을 가하면 안 된다. 집사람이 학생들을 체벌했다고 하는 순간 이혼하겠다고 했고 무조건 말로써 학생의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 단체기합 그리고 매질은 너무나도 야만적인 교육방법이라며 나에게 바뀌지 않을 거라면 결혼생활을 하지 말자고 했다.


2) 학생이 아프다고 하면 바로 병원으로 보내거나 귀가를 시켜야 한다. 학생이 꾀병이더라도 그것은 학생이 수업을 들을 의지가 없는 것이다. 꾀병이 반복된다면 학생과 대화를 시도하고 이유를 들어봐야 한다. 학생이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3) 내가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생각하고 이해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 처음 배우는 것들이 절대 쉬울 수는 없다. 우리 아들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더 차근차근 알려줘야 한다.


4) 고등학교에서 선생을 한 지 20년이 넘어간다. 내가 가르치는 수학도 기본적인 원리는 변하지 않지만 최신 경향은 계속 바뀐다. 항상 해외의 입시문제도 찾아보면서 나도 무조건 공부를 해야 한다. 알아야 뭘 가르치든 말든 할게 아닌가.


5) 학생이 질문을 했을 때 내가 모르면 인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찾아보고 학생에게 다가가서 가르쳐줘야 하고 나도 습득해야 한다. 선생은 신이 아니다. 학생과 같이 공부해 나가는 조력자이지 절대 위에서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면 안 된다.


6) 우리 아들도 소중하지만 학생들도 다른 집 귀한 자식들이다. 내 아들이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똑같이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느새 나는 이중잣대를 대는 사람이 될 뿐이다. 모두 똑같이 대해야 한다.


7) 학기 초에는 교무수첩을 들고 다니며 최소한 우리 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최대한 빨리 암기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학생들의 이름도 최대한 빠르게 암기해야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기네 반 학생 얼굴과 이름 그리고 가르치는 학생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다면 아이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예의이다.


8) 학교 안에서 동료 선생들과의 관계를 지켜야 할지 아니면 우리 반 학생들을 지켜야 할지 고민해야 할 상황은 항상 생긴다. 내가 본능적으로 전자를 택하게 되었을 때 나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질 각오를 해야 한다. 나도 실수하고 잘못하는 상황은 항상 생겼고, 생기고, 생길 것이다. 빨리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한다. 절대로 잘못을 덮으면 안 된다. 그 순간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9) 학생들에게는 지식뿐만 아니라 사회에서의 적정선이 어떤 것인지도 알려줘야 한다. 학교 안은 좁은 세상이다. 애들끼리 싸워도 선생이 덮을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가면 그런 행동들이 범죄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최대한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현실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내용이 더 있었지만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라 여기에 공개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수첩의 내용을 보고 이 사람은 좋은 선생님이라고만 이야기했을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흔들렸으면, 이런 말까지 적어가면서 버텨내야 했을까?'


저도 이 분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이 수첩에 이 글귀들을 적어가며 버텨내야 하는 게 현실이라는 게 조금 비참한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마 이 정도 의지라면 마음속에서 수많은 번뇌가 생기고, 매일매일 선택의 기로에 섰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모든 것을 비틀어서 생각하는 저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고,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어진 일에 대해서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저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또 다른 분들은 이미 저런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위의 글귀가 적힌 사진을 보면 그냥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만 듭니다. 그만큼 어려운 주제이고 생각해 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책임회피에 경종을 울리는 내용임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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