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글에서 우리의 삶을 영혼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3차원을 살면서, 영적인 세계에만 너무 골몰하는 것도 지구에 온 목적성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영혼의 세계를 완벽히 부정하고 살기에는 3차원의 논리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도 너무나 많이 있으니 말이다.
특히 현대에는 정신건강문제가 두드러지고 있는데, 정신건강 문제가 발현된 데에는 3차원적인 여러가지 이유들이 존재할것이다.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겠고, 너무나 고도로 경쟁화된 사회 등등 3차원 안에서의 이유를 충분히 유추 가능하고, 그를 개선함으로서 우리의 정신건강 또한 개선되기도 한다.
다만 그것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우리 각자의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딱히 부족하거나 모자랄 것이 없는데 마음 한켠에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 뭔가 모를 결핍감, 이유없이 다운되는 컨디션, 무기력증, 불면의 밤과 가벼운 우울, 항상 함께 자리하고 있는 불안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수면아래 잠들어 있다가 어떤 시점에 튀어나와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선 3차원적인 시야 안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치료하는데 최선을 다해볼 필요가 있다. 영혼의 상태도 육체에 영향을 주지만, 육체의 상태 또한 영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해보아도 별 효험이 없다면, 우리는 조금 다른 시야로 우리의 상태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영혼의 상태는 육체에 반영된다
영혼 각자는 창조력이 있고, 그 창조력을 사용해 자신의 삶과 육체적 상태를 창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치를 향해 여러가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영혼자체의 에너지에 손상이 가 있는 경우는 육체에까지 그것이 반영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인간세상에서 생생한 깨달음을 통해서 손상된 에너지를 보완하고자 하는 경우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애초에 영혼 자체의 상태가 크게 나쁘지는 않았으나, 반복된 삶 속에서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에 이르지 못하면서 에너지 성장이 지나치게 더뎌지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같은 목표점을 향해서 수도 없이 도전을 한 경우들이 있는데, 이때 마지막 한 끗을 못 넘고 계속해서 에너지만 깎아먹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하는 영혼이 있다. 유추해보건대 그 존재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마주하기도 하였겠지만, 자기 안의 조건부의 사랑을 관찰할 수 있는 여러 생을 살았을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을 하나하나 다 깨고, 완벽히 자신을 버린 더 큰 사랑의 존재로 향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배우고 싶은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겠으나, 계속해서 조건부의 사랑만을 경험한다면? 오히려 '그래 사랑은 기브앤 테이크지'식의 사고가 강화되었을 수 있다. 이게 고착화되어버리면 자신의 목표성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고, 유의미한 성장은 어려운 채 왜곡된 세계관이 고착되어서 그 안에 오랫동안 빠져있을 수가 있다. 이런 생이 반복되면 큰 성장은 어렵다.
왜냐하면 영혼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관념의 굴레를 깬, 자유로움이기 때문이고, 영혼은 그럴 때 성장을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처럼 영혼이 자신의 성장 동력을 잃거나, 방향성을 잃고 헤맬 때, 또 특정 퀘스트 앞에서 자꾸 실패를 경험할 때 영혼적인 무기력감이(사람과 마찬가지로) 쌓이게 된다.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삶에서 드러난다.
우리 인간의 삶도 어떤 때에는 한치앞이 보이지 않는 때가 있다. 난 뭘 위해 살아야 하지? 왜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삶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 같고 난 여전히 행복하지 않지? 하는 때 말이다. 영혼들도 똑같이 그런 감정들이 있다.
수 생을 통해서 또한 영혼들은 여러가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많은 일들을 말이다. 아마도 자신의 높은 목표성 하에 그런 큰 경험들을 계획했거나, 혹은 본인 자신이 가진 카르마 반동의 결과로 그 일을 겪었을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일들은 대부분 감정적인, 혹은 에너지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때 해소되지 않고 축적되어왔을 때, 현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최면치료하는 것을 보면 전생의 기억을 유도해낼 때가 있다. 대부분의 영혼은 특히나 자신에게 잊히지 않는 특정 생이 있고, 그 특정 생에서 축적된 무언가가 현생에서도 발현이 된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다거나, 굉장히 심플하게 살고 있는데 내 마음 안에서는 실타래가 가득하다거나 하는 다양한 형식으로 말이다.
한 영혼이 여전히 특정 전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사실 그 특정 전생이 문제라기 보다는 그 전생을 만든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 대부분 카르마에 관련된 것이고 그것은 현생에서도 형태를 바꾸어서 더 증폭되었을 수 있고, 그 카르마를 거의 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세히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생의 기억이든, 현생의 문제이든, '우리가 굴레에 빠져있는 부분이 무엇인가, 그것을 스스로 깨고 나올수 있겠는가'관점으로 관찰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
조금 다른 시야라 함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치료나, 굿이나, 퇴마술 같은 것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방법들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아는 것일 거다.
영혼이 성장하는 원리를 보면, 우선적으로 자신의 틀이 한번 깨져야 한다. 무언가를 하나 깨고 나오면, 그 틈으로 낡은 것들은 버려지고,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된다. 우리는 우스개로
온 우주의 힘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우스개가 아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거나 하는 식으로 에너지를 섭취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우주와 소통하고 있고 우주로부터도 에너지를 받고 있다. 세상은 우리를 도와주려는 에너지로 가득하며, 다만 그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고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자연물에는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정령들이 우리의 정화를 도와주며, 각자에게는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의 존재들이 있어서 알게모르게 우리를 돕는다. 또 우주의 큰 에너지들이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이 우주에 골고루 사랑과 높은 지혜를 뿌려주고 있다.
나의 틀 하나를 깨면 새로운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차크라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을텐데, 편하게 보통 상-중-하 단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새로운 에너지는 우리의 상단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입될 수 있는데, 이것은 보통 내가 나의 틀 하나를 깼을때 새로운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왜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굉장히 힘든 일을 겪었고 살이 쪽 빠질만큼 시달리다가 어느날 아침 머릿속에 반짝!하고 '아, 내가 이래서 이런 일을 겪었구나' '아, 이 일을 통해 내가 깨닫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었구나'하고 스쳐가는 그런 순간 말이다. 상단전 쪽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 조금 높은 시야로 향하고자 할때 에너지가 새로이 유입된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의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 먼저고 말이다.
여러 글을 통해서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그것은 곧 나의 카르마를 깨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반복되었던 테마가 있다면, 내가 그것을 반복해서 겪은 이유를 조금더 높은 영혼의 시야에서 생각해보고, 그 굴레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카르마를 깨 가는 과정이다.
카르마를 깬다는 것은 또한 자신만이 갖는 두려움을 깨나가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기존의 살아오던 관성과 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그동안 그러한 모습으로만 살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은 나의 두려움에 갇혀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남들은 하나도 안 무서워 하지만 나는 너무도 무서운 한 지점이 있고, 삶에서 그것이 계속 발목을 잡는다면, 그것들을 내가 깨고 나온다면 내 삶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된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이다.
'나의 틀을 깨고 새로운 에너지의 통로를 연다'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에너지의 회복이고 또한 성장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실 원인 미상, 치료방법 미상의 대부분의 정신건강의 문제는 자신의 인간적-영혼적 공통의 목표를 찾고, 그를 향해 나아가면 많은 부분 개선될 것이라고 본다. 영혼의 목표성은 있으나, 자아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간적 시야 안에서의 삶만을 이어나가려고 한다면 영혼의 에너지는 성장이 어렵고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되기도 어렵다. 결국 영혼의 목적성을 완성해주는 것은 육체를 가진 자아이기 때문이다.
정신건강문제, 배부른 소리?
지금은 그런 경향이 많이 줄었지만, 십수년 전만 해도 정신건강의학과는 진짜 심각하게 문제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으로 치부되었었고, 심리상담도 지금처럼 보편적이지가 않았다. 대체적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 곱게 커서 그렇다' '먹고 살기 편하니 배부른 소리한다'식의 반응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신건강 문제는 시대적 흐름이다. 비단 현대인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로만 모든 문제를 퉁치기란 어렵다. 시기적으로 지금은 많은 영혼들이,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제한성의 지점을 깨고 싶어하는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표면화되는 것이다. 자아가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도 있고, 문제를 표면화함으로서 영혼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지점에 빠르게 도달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약함의 문제랄지, 스트레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먹고살기 편하고 여유있으니 저런 문제가 생긴다'라는 발언도 많은 것들을 시사해준다. 이전시대와 지금시대의 차이는, 적어도 대한민국만 보자면 현재로서는 먹을게 없어서 굶어죽을 시대는 아닌 것이다.한시대 전에 인간이 이 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동력은, 그리고 이 삶을 꾸려나갈때의 가장 큰 목표성은 '먹고살기 위해서, 목숨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와 같은 육체적 생존본능, 그리고 그에 따르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삶을 창조하는 많은 동력이 생존본능이나,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그 이상으로 가려고 한다. 생존본능이나, 두려움을 통해서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과 나 자신이 같이 원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내 영혼과 자아가 동시에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짜'원하는 삶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와중에 도리어 우리의 생존본능을 자극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삶을 창조하고자 하는 관성을 크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움으로 향할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마주하고, 깨는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그랬고, 현재의 경제 위기, 지구 곳곳의 전쟁의 위기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더이상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시야 속에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 우리 각자의 본성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삶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말하는 영혼의 이야기는, 각자의 삶을, 얼마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어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창조력'의 이야기이다. 나를 위협하는 것들이 계속 내 목줄을 조여오는 것 같을때, 당신은 어떤 것들을 더 크게 느끼게 될까. 생존의 본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들을 뛰어넘어 내 영혼 깊숙이에서부터 원하는 '그 어떤 것'으로 향하는 삶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것일까. 나는 양쪽을 계속 오락가락 했지만, 결국은 후자 쪽으로 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