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밤의 공원에서

by 김경민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그날도 시험 기간이었고 나는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열람실 창문으로 눈부시게 들어오던 쨍한 햇빛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창밖은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 밖을 나왔을 땐 거리가 제법 한산했다. 거리의 가게들은 불이 꺼진 채 길게 줄지어 있었고, 가게 사이사이의 골목에는 이따금 노란 가로등만 제빛을 밝히고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얼마나 걸었을까. 이내 사람의 말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인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아보니 공원이었다. 공원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밤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낮과는 또 다른 공원의 모습에 나는 불쑥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공원에 놓인 산책길에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낮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은 탓에 걸음마다 뜨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그렇게 덥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미적지근했다. 그러나 그 바람이 몸을 스칠 때면, 답답하다기보단 오히려 그 무감각함에 포근함을 느꼈다. 공원 벤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앉아 나지막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퇴근한 젊은 직장인들, 반려견 산책을 나온 부부, 운동을 나온 중년, 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들····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들이 하나둘 꽃 피어났다.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비로소 당신에게 전하는 시간. 낮의 공원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있어 잠시 한숨 돌렸다가 가는 정거장과 같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드리워지는 순간, 비로소 사람 사는 이야기들로 온정이 오가는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 밤의 공원이 가진 매력이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공원의 푸른 잔디밭에는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재밌을까.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소녀들의 명랑한 목소리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의 귓가에 정확하게 꽂혔다. 얼핏 들어보니 최근에 나온 아이돌 그룹 얘기, 시험 기간에 수행평가를 낸 선생님에 대한 짜증, 연애···· 뭐 대충 그런 얘기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사춘기 소녀들이 아니던가. 방정맞고 툴툴거리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들만의 순수한 우정을 나누는 시절. 그 소녀들에게서 나는 나의 학창 시절을 보았다. 친구가 앞머리만 잘못 잘라도 박장대소를 하던 나.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도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셨을까? 풋풋하고 생기 넘쳐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나는 왠지 모를 아련함을 느끼면서 소녀들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교수님들도 대학생들을 바라보며 이런 심정이실까? ‘인생에서 가장 꽃다울 나이지.’ 문득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꽃답지 않은 나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내가 괴롭다고 생각 하는 현재가 사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 인해 그렇게 가슴 아파할 필요도, 그런 자신을 미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기쁨도, 고통도 과거의 한 페이지로 돌아가면 그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저 현재를 즐기는 것. 과거 또한 지나간 현재의 집합이라면 우리에게는 오직 지금만이 존재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만이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날 뿐이다. 공원 위를 반짝이는 저 수많은 별들처럼.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낭랑한 웃음소리 때문일까. 그날, 초여름 밤의 공원을 나오며 내 마음은 이미 충만해져 있었다. 마치 비어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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