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던 어느 날, k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와는 도통 연락이 뜸했던지라 오랜만에 휴대폰 화면 속에 비친 그의 이름을 보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 내가 독서모임을 하나 만들었거든. 이번 주 토요일 오후 2시야. 한번 와보지 않겠어?” 대뜸 독서모임에 참여해달라며 3개월 만에 연락을 해온 그였다.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 연락을 한 그의 간곡함 또한 무시할 수 없어 결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어지간히도 사람이 없나 보네’ 거짓말로 거절하기엔 일말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부디 거절할 만한 명분 거리가 있기를 바라며 주말 일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역시 갈 운명이었을까. 하필 토요일만 시간이 비어 있었다. 앉아서 허탈하게 웃으며, k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갈게”
토요일 오후 1시 50분. 카페에는 나를 제외한 4명의 사람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형식적인 질문들이 오가던 와중 k가 본격적으로 진행을 시작했다. “먼저 자기소개를 할까요?” k를 선두로 자기소개를 하던 그때, 드디어 그녀의 순서가 왔다. 카페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유독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는 앙상하게 마른 체형에 회색 머플러를 겹겹이 둘러맨 채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저는 김혜선(가명)입니다.” 나지막하고도 짧은 자기소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그녀는 단숨에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그 후 1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떠들썩한 대화를 조용히 바라볼 뿐. 그렇게 모임이 끝나고 그녀는 조용히 카페를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적막했다. 창밖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내 그녀를 떠올렸다. 1시간 남짓 한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나에게 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러나 선명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녀는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 가만히 생각하던 중 정신을 차렸을 땐 라디오에선 이미 오늘의 신청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쓸쓸하면서도 고독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니 문득 영화 The Piano의 독주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에이다가 노을이 질 때까지 뉴질랜드 해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 모습이. 그리고 이내 에이다의 얼굴 위로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화 The Piano는 1800년대 말, 20대의 미혼모 ‘에이다’가 9살의 사생아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6살 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한 에이다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는 피아노와 딸 플로라뿐이다. 그러나 남편 ‘스튜어트’는 에이다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피아노를 홀대하고, 이로 인해 에이다는 스튜어트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에이다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던 베인스에게 점차 사랑을 느끼고, 결국 그와 함께 뉴질랜드 섬을 떠나게 된다.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이자 동시에 한 사람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에이다는 6살 때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으로부터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말하기 대신 피아노로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표현한다. 그녀에게 피아노란 그림자와 같은 것.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서 에이다는 결국 피아노를 바다에 버리고 떠난다. 그 후 새로운 마을에서 베인스와 안정된 가정을 꾸리며, 다시 세상과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에이다는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침묵을 결심하게 된걸까.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날에도 에이다가 존재한다는 것. 그들은 결국 침묵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 에이다에게 있어 피아노는 자신에 대한 속박이자 구속이었다. 그렇다면 카페 속 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우산을 쓴 채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다시 한번 카페를 뒤돌아보던 그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