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칭찬, 세상없는 적극성
영대 씨는 올해 여든일곱 살뿐이 안되었다.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사진만 보고 시동생이 저렇게 살 생겼으니 영 못생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층층 시하로 시집왔다. 종가가 뭔지도 모르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왔다. 큰 아들을 2박 3일 산고를 치르고 낳았다. 다음 해 시어머니는 위암으로 53살 청춘에 8남매를 남겨두고 죽었다. 그래서 남편과 신접살림으로 나가 살다가 시할머니와 시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신혼을 접고 시골로 들어왔다. 큰아들이 상복을 입고 있는 낯선 모습 때문에 젖을 먹지 않았다고 기억을 했다. 시어른과 시동생, 시누이를 키우고 시집 장가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어무이 나도 따라가렵니다'하고 꽃 상여를 부여잡고 울었다고 말했다. 남편을 박봉의 공무원이었고, 시어른이 남겨놓은 빗도 있어서 살아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집안일을 거드는 사람은 없고 때는 오죽 잘 닥치고 제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있어서 들일을 하다가 나물에 밥이라도 한 그릇 올리려면 바쁠 수밖에 없었다. 시동생 시누이는 곱게 커서 일은 안 하고 겉 멋만 잔뜩 들어서 얄미웠다고 했다. 남편은 월급봉투를 갖다가 준 것은 아이들이 학교 다닐 무렵부터였으니 그동안은 이 집에서 빌렸다가 저 집 돈을 메우는 식으로 쪼들리는 생활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시동생, 시누이 공부 시키고 결혼시키느라 자기 자식은 항상 뒷전이었다고 했다. 남편도 부족함 없이 자라서인지 아내와 의논도 없이 쓰는 바람에 싸움을 하려고 들면 집안이 조용할 새가 없었을 것이다. 집안 이야기를 동네 사람 잡고 할 수 없어서 담뱃집 할아버지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힘든 상황을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 ' 40살이 넘어가면 너 돈도 남을 줄 때가 있을 것이다'라며 위로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정말 그런 때가 올까 싶었는데 40대 이후부터는 살림살이가 차츰차츰 풀리는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면 꼭 어디 가서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40대 이후부터는 새마을 부녀회활동, 국민학교 동창회 모임, 공무원 부인모임 등 여러 모임을 나갔다. 동네 사람이 ' 형님은 이 바쁜 농사철에 양산 쓰고 어딜가냐?'부러움이 섞인 말을 건네었다고 말했다. 젊어서 온갖 시집살이를 했으니 이제는 내 맘대로 다니고 놀고 싶으면 아무 때나 놀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은 들은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팔자도 길들이기 나름이니 자기는 일만 하다가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했다. 무뚝뚝하고 버럭 승질을 내는 남편이지만 영대 씨가 관절염과 어디가 아프기라도 하면 여기저기 용하다고 소문난 병원을 데리고 다녔다. 어디서 어떻게 나았는지 알 수 없지만 500M도 잘 걷지 못해서 주저앉을 때가 많았는데 80대에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 아주 신기한 일 중에 한 가지로 꼽았다. 남편의 딱 한 가지였는데 팬대를 굴리는 사람이어서 옷에서 땀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다. 남편은 자기 몸을 잘 챙겼지만 지병인 당뇨가 있었는데 무리하게 중국을 갔다 오면서 점점 더 약해지고 당뇨 합병증까지 와서 칠십 다섯 살까지 살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고 했다. 큰 아들은 울산 현대 자동차를 다녔다. 그래서 일찍 결혼을 해서 나가 살았다. 하나뿐인 딸은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에 시집을 보내 보려고 맞선을 30번 정도 보았다고 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왜소하고 가냘픈 공무원 하는 사위를 보았다고 했다. 남편이 공무원이었는데도 '안 죽을 만큼 주니까 살아'라는 야멸찬 말로 딸을 보냈다. 셋째 아들은 유교 집안임에도 혼자서 기독교를 고집하더니만 기어이 목사님이 되셨다. 15년을 혼자서 공부하고 공부해서 뚝심 있게 이루었다. 하지만 결혼할 시기를 놓쳤는지 눈이 높아서였는지 몰라도 미혼인 목사님은 경제 생활력이 없다. 막내아들은 처음에는 사진관, 연잎밥 식당, 찻집, 도마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묘목을 키우다가, 블루베리를 키우고 있다. 영대 씨는 남편이 죽고 유산 상속을 받을 때 큰 아들과 막내만 챙겨서 주라고 말했다. 딸은 시골에서 대학교를 시킨 것으로 퉁을 쳤다. 멀리 사는 딸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들 셋이서 재산을 나누었다. 동네 사람들이 요새는 딸자식도 자식인데 왜 그러냐고 의아해했다. 시동생은 딸이 효녀라는 말만 했다. 그 와중에 둘째 아들이 자신은 받지 않고 누나를 챙겨서 주라며 작은 밭은 물려주었다.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병수발하느라 힘들었다는 말을 앞세워 아파트 한 채, 논 600평, 건물 한 채를 물려받았다. 세상은 공평하더라, 이 사업 저 사업을 손댔지만 돈을 벌어보지 못한 경력만 쌓였다. 영대 씨는 대차지가 않아서인지 몰라도 두 아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죽고 나면 저 아들 둘을 어떻게 하나?'하고 근심이 오면 밤에 잠이 오질 않는다고 말했다. 밭에서 일을 끝내고 걸어오다가 밭둑에서 미끄러져서 허리에 금이 간 줄도 모르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가 큰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더니 바로 다음날 수술을 해서 지금은 잘 걸어서 다닌다. 다행이다. 울산 사는 손자가 와서 할머니가 만든 콩잎 장아찌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콩 농사를 그만 지으려고 했는데 별수 없이 내년에도 콩 농사를 해야겠다고 힘을 낸다. 늙은 쥐가 독을 뚫고 있다. 딸이 명절을 쐬러 먼 데서 오면 잽싸게 먼저 가서 80 노모가 밥을 챙겨서 준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다. 아? 또 한 가지 영대 씨는 딸 앞에서 절대로 절대로 하나뿐인 며느리 험담을 하지 않았다. 친정 엄마는 환갑 다음 해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87살까지 살 줄은 몰랐다면서 '자신이 대단하다'라고 셀프 칭찬을 했다.
연이 씨는 한 동네 사는 총각과 혼례를 했다. 그런데 옆집 사는 동생이 와서 그 사람 좀 이상하다는 소문은 알고 있냐고만 했던 말을 했더니 부모님은 '지 세끼 잡아먹는 범은 없다'라며 혼사를 맺게 했다. 약방을 하는 사람인데 내성적이고 당차게 자신의 말을 관철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부잣집에 큰 딸로 자라나서 힘들게 일은 하지 않았지만 눈썰미가 뛰어나고 당차고 대찼다. 시어머니가 남편과 자신의 사이를 시샘하고 이간질을 밥 먹듯이 했다고 기억했다. 약을 사러 온 친척이 약값을 적어 나마 아기 포대기에 넣고 가버려서 뒤늦게 남편이 알고 버럭 화를 내면서 유리 재떨이를 집어던져서 머리에 피가 나고 업고 있던 아기에게 피가 묻었다고 말했다. 25번 정도 같은 내용을 말했다. 엉겁결에 아기가 다쳤을까 봤더니 다행히도 유리 쪼가리 하나 없었다. 머리에 된장을 바르고 병원을 갔다 왔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약방 하는 남편은 바람도 피우고 시어머니는 7년 가까이 병시중을 하게 만들었는데도 도망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 네 명을 위해 뼈를 갈아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다고 기억했다. 남편의 폭력이 제일 억울했을 때는 허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연이 씨가 70대 초반이었을 때였다. 10년 전에 폐암으로 죽어 화장해서 뼈가 가루가 된 사람의 영정 사진을 산산이 부수고 사진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해도 한이 풀리지 않았다. 너무 애를 써서 사느라 저 밑에 내려두었던 썩은 내가 나는 한 덩어리가 허리를 부수고 튀어나왔다. 카더라 하는 통신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강남의 유명한 병원 예약을 하고 옷 차려입고 새벽버스를 4시간을 타고 강남으로 1년을 오가면서 치료를 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이 허리를 주저앉고 인공뼈는 무너지고 불뚝하니 꺾어지고 말았다. 겨우 일어서려고 힘을 주다가 손목에 무리가 가서 어깨 수술까지 해봤지만 제대로 문 밖을 제 발로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아들만 네 명이니까 셋째 며느리 바깥사돈이 하는 말은 '며느리 네 명이면 시어머니 단지 곰을 하겠다'이었다. 그래도 연이 씨는 꼿꼿한 자존심이 있어서 전동 휠체어를 타면 맘껏 세상을 다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래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물었다. 어디에 가면 저런 휠체어를 살 수 있는지를 캐물었다. 의사인 둘째 아들에게 물어봐도 가르쳐주지 않고 며느리들에게 물어봐도 속 시원한 말을 못 들어서 114에 묻고 물어서 택시를 대절해서 타고 가서 2년을 벼루어서 장만을 했다. 대단하다. 쌩하니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나섰다. 연이 씨는 계산이 빠르고 몸도 잽싸고 당차서 남편도 놀랬지만 아들은 더 놀랬다. 삶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의지를 눈으로 보았다. 큰 아들은 공기업 다니다가 퇴직을 했다. 둘째 아들은 소아과 의사, 셋째 아들은 고위 공무원, 막내아들은 컴퓨터 대리점을 크게 하고 있다. 연이씨는지금도 여전히 17명의 대가족을 잘 건사하고 있다. 오직 전화로 모든 걸 해결해 버려 목소리로는 아픈 표시가 전혀 나지 않는'테토녀'다. 셋째 며느리가 하소연으로 언제 자신의 아이들은 결혼을 할까요 물어보면 '말 탄 장사'인데 뭣하러 걱정을 하냐고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했다. 며느리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생신 때가 되면 챙겨드리고 하지만 어느 며느리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 없을 수밖에 없다 당차고 대찬 시어머니를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며느리 복은 있는가 보다 네 명이 전부 예 어머니! 네, 어머니! 하고 전화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큰 며느리에게는 막내며느리 욕을 하고 셋째 며느리가 가면 큰 며느리 욕을 했다 며느리를 돌려 깎기 했다. 전래동화에 <연이와 버들도령> 연이 씨는 자신이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 엉덩이를 질질 끌고 화장실을 다니는데 대소변 보기가 두려워서 과일을 먹으려고 하지 않지만, 입맛이 없다면서 누룽지를 끓여서 한 냄비를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삶에 대한 불타는 의지를 목도했더랬다. 의사 아들이 토요일마다 와서 근육 주사, 단백질 가루를 타서 먹게 하고 식사를 잘하고 힘나게 잠 잘 자는지 보러 오는 바람에 저승에 언제 갈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치과 의사인 손자가 자신 결혼 할 때까지 사시라고 덕담을 하는데 내일모레가 30세인데 곧 결혼을 하려나 모르겠다. 막내아들 손자가 서울살이를 하다가 방학에 와서 함머니 귀에다 대고 이런 말을 했다. '할매 서울 지름을 맛이 없더라! 꼬신 맛이 영 안 나데'했더니 바로 30년 단골 기름집에 전화해서 참기름을 배달시켰다. 설날 현욱이의 '참기름 득템' 한 이야기를 듣고 17명의 대식구는 배꼽을 잡았다. 연이 씨는 세상없는 적극성을 지녔다. 올해 팔십여섯뿐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