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백

시작

by 랑자

언제 끝날지 모를 나의 독백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한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 거창한 글을 쓸 생각은 없다. 지금까지 나는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순서대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이 브런치북에서는 그런 시간 개념을 없애고자 한다. 먼 과거 이야기를 쓸 수도, 당장 한 시간 전의 일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변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내가 겪은 일이거나 내가 생각한 일이다.


앞서 쓰고 있던 삶은 고통이다라는 브런치북을 완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브런치북을 시작하는 것은 나의 사색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브런치북은 온전히 나의 사색으로만 이루어질 예정이고 그렇기에 형편없을 수도 있다. 당연한 것이,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가 보기엔 빈틈 투성이에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은 글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분명 나보다 높은 곳을 오른 사람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경거망동할 수 없다. 배울수록 겸손해진다는 것의 의미가 그렇다.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지금까지의 내가 얼마나 바보였던 건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배운다면 그때는 지금의 내가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정진해야 한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 내가 모르기 때문이고, 정진해야 하는 이유도 아직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걸릴지언정 글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내가 걷는 길을 한 걸음씩이라도 떼려 한다.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과거의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나는 영화나 책을 즐겨보듯 애니메이션도 가끔씩 즐기는데 최근 "귀멸의 칼날"을 보면서 가슴 깊게 박힌 대사가 있다. 그 메시지는 이러하다.

"정점에 다다른 자가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같다. 시대가 바뀔지라도, 그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이 달라질지라도 (그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같은 곳에 도달한다."

당장 주변이나 인터넷을 뒤져서 어느 한 분야의 정점에 선 자를 떠올려 보자.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비슷하다. 나를 믿되 겸손해야 하고, 계속 나아가되 쉴 수 있어야 한다. 욕심을 부리면 화를 입고, 분노를 삼키지 못하면 분노가 나를 삼킨다.

어째서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비슷할까? ufc 챔피언이 하는 말과 주식 투자로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사람이 하는 말이 같은 이유는 뭘까? 그들이 하는 일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정답은 간단하다. 귀멸의 칼날에 등장하는 캐릭터 '요리이치'의 말대로 정점에 다다른 자가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ufc라는 배경에서 정점에 도달한 챔피언과 경제·금융이라는 배경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의 메시지가 비슷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들은 정점에 도달해 같은 곳에서 만난 것이다. 산을 오를 때 오르는 길은 제각각이라도 정상은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언제나 나보다 "위(上)"는 있다. 나는 아직 그곳에 올라서지 못했지만 정점에 도달한 자들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래에서 거세게 치고 올라오는 이들이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추락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은 밖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다. ufc 챔피언은 언제 이 자리를 빼앗길지 모르는 강박증에 시달려 오히려 몸을 혹사시킬 수도 있고 엄청난 부를 거둔 사람은 더 많은 부를 얻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다 결국 가진 것들을 다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다들 들어봤을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는 정점에 도달하고 나서도 편안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편안해질 수 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정점을 버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일까? 다들 편안해지고 싶어서 정점을 향해 달리는데 정점을 버리라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것 말고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가 꿈꾸던 삶 역시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제·경영·재테크·금융 등 돈과 관련된 분야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투자도 하고 매매도 해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늘 나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과연 이렇게 살아가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요한 노르베리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자 선언』에서 "경제적 자유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경제'가 아니라 '자유'다."라고 썼다. 어느 정도의 경험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나는 이 말에 크게 공감을 했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원한다. 자유를 얻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 정점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정점을 버리기로 했다. 내가 걷는 길의 정점에 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지점에 올라서면 나는 그 자리에 말뚝을 박고 살림을 차릴 셈이다. 그 이상의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했듯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큰 부는 더 큰 부를 원하게 되고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이 (경제적)정점에 도달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물론 이 내용도 어폐는 있다. 이것은 "물질적" 정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부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만들어낸 단어들이지만 그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내면의 정점은 어떨까? 정신적인, 내면의 정점에 서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사실 요리이치가 말한 정점은 내면의 정점일지도 모른다. 내면의 정점에 오른 자는 굴러 떨어질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면 절대 내면의 정점에 설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적 정점에 서는 것을 포기하고 내면의 정점에 서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불과 작년까지도 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싶었지만 지금 이루고 싶은 경제적 자유와는 완전히 다르다. 작년의 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게 어느 정도의 수준이 충분한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물질적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욕심에 화를 입어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충분함을 아는 것, 행복을 찾을 줄 아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우리는 진짜 정점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점이 아닌, 깊은 정점. 이 정점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한층 더 내려가본다.


주절주절 난해하고 어지러운 나의 독백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 같다. 내면의 말이 너무 많은 탓에 바깥으로 표출되는 말이 적다. 그래서 이렇게 글이라도 남겨두는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내면의 말로 찾아올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이해해 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고 이어나가려 한다. 누군가가 이 난잡한 나의 내면을 이해해 주기를, 나의 독백을 들어주기를.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