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불교 윤리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대 인도의 석가족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오늘날 석가모니(석가족의 성자) 또는 부처(깨달은 자)라고도 불립니다.
싯다르타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성자라고 불릴 만큼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일까요?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왕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인 싯다르타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부와 권력을 맛보게 해줍니다.
16살에는 세 채의 궁궐을 지어 선물해 주었고, 17살에는 가장 예쁜 여인과 결혼을 시켜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를 통째로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궁궐 안에서 좋은 것만 보면서 자라던 싯다르타가 궁궐 밖에서 생생한 삶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늙어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노인,
전염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부자,
죽어서 흉측한 시체로 변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싯다르타는 왜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까요?
여러분들은 혹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원에 가본 적이 있나요?
쌤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병간호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코 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
동공이 풀린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환자들,
온몸에 부착되어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들,
환자가 간신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심장박동 모니터 소리...
항상 생동감 넘치는 학생들과 지내는 쌤이었기에 그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쌤은 그때 처음, '사람은 죽는구나.'라는 사실을 몸으로 생생하게 느꼈답니다.
싯다르타는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삶의 민낯을 목격한 것이지요.
그리고 건너편 숲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한 수행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수행자는 다 떨어져가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매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수행자처럼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날 밤, 싯다르타는 길었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행복의 길을 찾아 궁궐 담을 뛰어넘습니다.
싯다르타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수행을 시작합니다.
히말라야 산속에서 하루에 보리 한 알로 연명하면서 6년 동안 고행을 합니다.
그가 얼마나 힘들게 수행했는지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무덤가에 가서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내 몸을 가렸다. 외양간에 가서 송아지 똥이 있으면 그것을 집어먹었다.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기고 피부와 살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내 머리는 깨진 조롱박 같았다. 내 엉덩이는 낙타 다리 같았고, 손으로 배를 누르면 등뼈가 닿았다. 가시 위에 눕기도 했고, 못이 박힌 판자 위에 눕기도 했으며, 새처럼 공중에 몸을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태우기도 했고, 몹시 추운 날에 얼음에 앉거나 물속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싯다르타는 고행을 통해 행복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만 피폐해졌을 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우연히 지나가는 두 음악가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스승님, 좋은 기타 소리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기타 줄을 잘 감아야지."
스승이 답했습니다.
제자는 기타 줄을 팽팽하게 감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타 줄을 너무 많이 감았는지 어느 순간, '탱' 하고 기타 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팽팽하게 감으니깐 기타 줄이 끊어지지. 기타 줄이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감아야 된단다."
별것 아닌듯한 대화에서 싯다르타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쾌락과 고통이라는 양극단을 벗어나 심신의 조화를 얻는 중도(中道)를 따를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쌤은 축구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축구를 더 잘하고 싶어서 개인 훈련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축구를 더 잘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훈련 강도를 너무 높이면 꼭 부상을 입게 됩니다.
부상을 입으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을 쉬어야 되기 때문에 훈련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게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훈련을 전혀 안 하고 놀면, 몸이 점점 둔해지고 축구 실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수행을 할 때 너무 과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중간의 지점을 찾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싯다르타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의 고행을 멈추고, 편안하게 명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보리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던 중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자, 즉 석가모니가 된 것이지요.
석가모니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행복의 길을 전합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전국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따르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50년간 가르침을 전하다 80살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 후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따르는 사람들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위 그림 속의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넘어지는 벽에 깔려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벽에 깔리는 순간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A: 아이씨, 재수 더럽게 없네!!! �
B: 내가 벽을 밀었기 때문에 벽이 넘어졌구나. 다음부턴 조심해야겠다. �
A, B 중 누가 현명한 사람인가요?
A는 자신이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을 찾지 못하고, 그저 재수가 없어서 불행이 닥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B는 고통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A와 B에겐 어떤 일이 닥치게 될까요?
아마 A에겐 비슷한 불행이 계속해서 찾아올 것입니다.
고통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B는 불행이 계속 반복되는 사슬[윤회]을 끊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이 세상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고통을 겪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진리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 모든 것은 원인[인]과 조건[연]의 상호 관계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일컬어 연기설이라고 합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우리 속담 속에 연기설의 진리가 담겨 있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자라는 경우는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콩을 심었는데 팥이 자라길 바랍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성적이 오르길 바라고,
저축을 하지 않고 부자가 되길 바라며,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길 바랍니다.
내가 한 행동[업]이 원인이 되어 언제가는 돌려받는다[보]는 믿음이 바로 연기설입니다.
인과응보라고도 하지요.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여 나쁜 결과를 돌려받았을 때,
"그게 다 네 업보야"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설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불교에서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이번 생(현세)에만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내세)에도 돌려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난 생(전생)에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이번 생에 돌려받게 된다고 보았죠.
불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중생)는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불교의 사상을 가리켜 윤회 사상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윤회하는 존재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으며, 그 어느 것도 윤회하는 영혼이 잠시 머무는 상태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즉 쌤이 이번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님들은 걸을 때에도 혹시 개미를 밟지 않을까 조심조심 걷는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절 밥을 먹어본 적 있나요?
절 밥에 왜 동물의 고기반찬이 없는지 알겠지요?
동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윤회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동물에게 나쁜 행동(악업)을 하면 언젠가는 나쁜 결과(과보)로 돌려받는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불살생]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에게 잡힌 동물을 놓아주는 '방생'이라는 의례를 하기도 한답니다.
다시 연기설로 돌아가 볼까요?
세상 모든 것은 원인[인]과 조건[연]의 상호 관계에 의해 생겨난다고 했죠?
사람들 사이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갈대 밭에 갈대가 홀로 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갈대는 옆에 있는 갈대에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리켜 인연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은 함께 살고 있는 가족, 같은 반의 친구, 옷깃을 스쳐가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나요?
불교에서는 전생에 수많은 인연이 쌓여야 현생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할까요?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자비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비는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고통을 제거해 주는[비] 사랑의 마음입니다.
불교 연기설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세상 모든 것들은 원인[인]과 조건[연]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지요.
미워하는 사람과도 같이 지내야 하고요.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지만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적게 느껴집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지요.
이렇듯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말이 좀 어렵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쌤은 '과연 이 사람이 내가 맞나?' 하고, 깜짝 놀란답니다.
특히 여러분들 나이 때의 쌤 사진을 보면, 현재 거울 속에 비친 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서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는답니다.
쌤은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10대 후반에 방황을 많이 했어요.
반항기가 심했고, 사고도 많이 쳤지요.
사진 속 쌤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답니다.
18살에 쌤은, 20년 후에 내가 윤리 교사가 돼 있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답니다.
지금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쌤에게 "네가 윤리 교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참 암울하다."라고 놀리곤 한답니다.
현재 41살이 된 쌤은 18살 때의 쌤과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윤리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한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 보니 성격도 인상도 많이 변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과연 쌤은 어떤 사람인가요?
18살의 반항기가 넘치는 사춘기 소년이 쌤의 본질일까요?
아니면 41살의 윤리교사가 쌤의 본질인가요?
과연 쌤의 실체는 뭘까요?
그저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사실 말고는, 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렇듯 불교에서는 세상 모든 것들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한다. 따라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놓치고 살아갑니다.
젊음과 건강,
사랑하는 사람들,
즐거운 취미생활,
더 많은 돈...
이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언제나 18살 때처럼 젊고 건강하길 바라지만, 늙고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던 게임에 중독이 되어, 게임을 하지 못하게 되면 화가 나고 우울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니지만, 내가 가진 돈은 언제나 적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그 바램은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집착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석가모니는 집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무명]로 영원하지 않은 것에 매달려[집착] 삽니다.
불교에서는 무지와 탐욕이 집착을 불러일으키고, 집착으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없애 버리기 전까지, 고통은 윤회를 하면서 끝없이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착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세 가지 수행법[삼학]을 제시합니다.
첫째,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
둘째, 명상을 통해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정]
셋째, 부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혜]
삼학은 여러분들이 공부할 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 가서 문제만 많이 풀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앉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휴대폰이나 게임과 같이 공부에 방해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정해진 규칙에 따르는 것이, '계'입니다.
두 번째는 공부할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조용한 곳에 앉아서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만드는 것이, '정'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책을 보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 지혜를 쌓는 것이, '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요?
혹시 계와 정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혜 공부만 하고 있지 않나요?
책을 많이 보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혹시 나에게 나쁜 습관이 있지 않은지, 잡생각 때문에 집중을 못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계, 정, 혜의 삼학과 같은 수행 방법을 통해 집착을 없애 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집착을 없애 버림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면, 열반 혹은 해탈이라는 행복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사슬을 끊고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불교의 한 종파인 대승불교에서는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제 석가모니가 제시한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나요?
행복의 길이 너무 단순한가요?
원래 대부분의 진리는 단순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고,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기 마련입니다.
석가모니는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불난 집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석가모니는 우리에게 빨리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라[해탈, 열반]고 외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혹시 장난감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타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있진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