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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Aug 19. 2024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은 이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고등학생 1학년 때 <꿈>을 보았던 것이 뇌리에 아주 강렬하게 남았는지, 지금도 문장이 안 써질 때는 '이런 꿈을 꾸었다'라고 일단 써보고는 한다. 그렇게 하면 아키라 감독의 영화와 같이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이지만, 단 한 번도 나의 이러한 바람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한낱 꿈에 불과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되어있는 영화 <꿈>은 이미지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내게 큰 인상을 남겼는데, 특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후 유일하게 일본에 남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두 어린아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가장 강렬했다. 이 영화가 개봉한 것이 1990년이었고,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나는 더욱 기함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도대체 어떤 꿈을 꾼 것일까. 


하여튼 그 질문에서 출발해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익숙한 골목이다. 어린 시절, 외가가 있던 대구의 어느 골목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꽤 허름한 집에 들어간다. 외관은 그냥 동네 조그마한 구멍가게인데, 그 가게 안은 의외로 일반 가정집이다. 나는 그곳에 살고 있다(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그 집에는 오직 나만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문이 있다. 


이 집에서 이 문을 발견한 건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만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면, 그 안에는 정말 으리으리한 한옥이 존재한다. 아무도 없지만, 아름드리 꽃도 피어있는 넓고 아름다운, 'ㅁ'자 구조의 고즈넉한 한옥이다.


나는 그곳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다닌다. 정말 꿈같은 공간이라고 느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옥과 어울리지 않는 양철문을 구석에서 발견한다. 문을 연다. 갑자기 거대한 회색벽을 마주한다. 회색벽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미로 같은 축축하고 캄캄한 하수도가 등장한다. 나는 그곳을 걷는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지만 누군가 쫓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재촉하듯 걷는다. 그러고는.


땀에 범벅이 되어서 잠에서 깼다. 어젯밤의 이야기다. 거의 2년 만에 이 꿈을 다시 꾸다니. 악몽 치고는 도입부가 너무 아름답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후반부가 너무 무서워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지는 꿈. 2년 전 꿨던 꿈과 너무 똑같아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이 꿈의 내용을 다시 기록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선생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말하셨는데, 과연 나의 어떤 무의식이 이런 식의 꿈을 만들어낸 건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이 꿈을 다시 꾼다는 건 께름칙한 느낌만 줄 뿐이었다. '어떤 서사도 없고, 단순히 이미지와 감각의 나열일 뿐인 이 꿈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건 무엇일까'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는데,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였다.


어린 시절부터 난 유독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건 가지고 싶은 직업이기도 했고, 그 직업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기도 했고, 플라톤이 말하던 이데아 같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욕구이기도 했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다 보면 도착하는 망상의 끝이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속 한국인들이 외치던 것과 달리 나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덕분에 꾸던 꿈들을 포기해야 할 때도 많았다. 재능이 없다는 핑계로 도망쳐야 했던 영화나, 누군가를 좋아하던 일이나, 서른 전까지는 꼭 이뤄야지 했지만 어째서인지 이뤄내지 못했던 것 같은. 그래서 결국 내가 이제는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도 애매모호해진 지금과 같은 때들. 


꿈이라는 단어는 참 신기한 게, '잠을 잘 때 꾸는 꿈'과 '어떠한 것이 이뤄지길 바라는 꿈'이라는 뜻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또 독특한 게, 이러한 특성이 한국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다수의 언어에서도 똑같다는 거다.


그렇다면 드는 생각. '잠을 잘 때 꾸는 꿈'이 먼저 만들어진 의미였을까, 혹은 '어떠한 것을 바라는 꿈'이 먼저 만들어진 의미였을까. 전자가 먼저였다면 우리의 공통된 먼 조상들은 '어떠한 것을 바라는 건 한낱 꿈같은 행위'라고 생각했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떠한 것을 너무 바라기 때문에 꿈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는 걸까. 또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결국 도달한다는 사색의 끝은 이렇다. 나는 후자의 말 그대로 '어떠한 것을 너무 바라고 있기 때문에 어젯밤과 같은 악몽 아닌 악몽을 꿨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개꿈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답을 찾으려는 한낱 꿈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걸까'다. 꿈 보다 해몽이라고 하지만, 해몽도 하지 못하는 건 내가 꾸었던 꿈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설명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다.


덕분에 나는 그저 '이런 악몽 밖에 꾸지 못하는 내가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물음 밖에 하지 못한다. 그게 잠을 잘 때든, 혹은 깨어있을 때의 꿈이든,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꾸었던 꿈만 붙잡고 사는 어른이 된 것만 같다는 슬픔이다.


그래서일까. 숱한 밤을 취기에 기대어 비틀거리는 못난 어른이 된 내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우고, 어떤 어른이 될까 꿈을 꾸던 과거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는 것도 고작 이런 말 뿐인 거다.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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