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마치고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에 올라 거의 3주째 붙잡고 있는 아마르티아 센의 책을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 5시간이 넘게 걸릴 것 같아, 이참에 다 읽어보자는 심산이었다. 추석이지만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사람을 집어삼킬 듯했기에, 에어컨에서는 시종 차가운 바람이 나와 내 머리맡을 식히고 있었다. 버스의 미세한 떨림에 몸을 맡기고 하나하나 활자를 읽어나갔다.
글을 너무 빨리 읽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눈으로 훑었다. 1시간이 지났을 때였나, 겨우 70페이지쯤을 넘겼을 때이기는 했다. 커튼과 커튼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햇빛이 들어왔다. 책을 읽는 눈을 계속해서 따갑게 찌르는 탓에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좁은 버스 좌석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커튼 틈을 막기 위해 책을 잡은 손으로 커튼을 눌렀다. 오히려 버스의 떨림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두꺼운 책을 들고 있기는 더 고역이었다. 결국 책을 덮었고, 눈도 닫았다.
선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3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한 여성분이 키득거리는 소리에 깼다. 나 때문에 웃는 건가 했는데, 핸드폰에 영상을 켜둔 걸 보고는 안심했다. 책을 다시 읽기에는 눈이 침침해서 아예 커튼을 걷고, 창밖을 구경했다. 지나가는 것이라고는 차들과 지루한 산의 단면뿐인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의 떨림이 그대로 머리를 진동시켰다. 그래서 악착 같이 기대었더니 어느 순간, 그 진동에 적응했던 건지 더 이상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실눈을 뜨고 해가 여전히 뜨겁게 기온을 올려대고 있는 바깥의 풍경들에 집중했다. 차량의 번호판들, 이따금씩 지나가는 비싼 외제차들, 산사태를 막겠다고 콘크리트를 한 면에 쌓아 올린 산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내가 붙들고자 해도 속절없이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것들이 있다. 내가 당장 테러리스트처럼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다가가 “브레이크를 밟아 당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들이나,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 같은 것들. 나라는 한 사람의 의지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 붙어도 잡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것도 있다. 속절없이 흘러버리는 시간이나 그 속에서 천천히 소멸하는 필멸의 운명 같은 것들. 언제나 그것들이 영원할지 알고 나태하고 오만하지만, 결국 떠나가는 순간이 오면 그저 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자각하게 만드는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커트 골드스타인이 말한 ‘자아실현’이라는 용어가 있다. 딱히 개념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머리에 담아두고 사는 편은 아니라, 쉽게 위키백과의 설명을 따오자면 “사람의 전체 잠재력을 깨우기 위한 동기”라는 뜻이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내가 창밖의 풍경들을 구경하면서 떠올린 낙담과는 반대일 거다. 정확하게 나는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잠재력도 하등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니.
어릴 적에는 누군가를 만나면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자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 역시도 그때 강한 ‘꿈’을 가지고 있었으니, 누구나 다양한 꿈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꿈들을 들으면 나는 강한 동기를 가지게 됐고,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내 꿈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과거의 ‘나’가 “꿈이 뭐예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머뭇거릴 뿐이다.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2연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농담 따먹기일 뿐이고, 실상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목표가 무엇일까?’라고 곰곰이 씹어보자면 그저 입에서 나오는 침만 꿀꺽 삼키는 게 나의 현주소다.
‘인생의 GPS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자주 한다. 분명 어디쯤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데 GPS는 나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갈림길의 도로들은 계속해서 등장하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산으로 그저 영화 <스피드>의 키아누 리브스처럼 엑셀만 밟고 있는 거다. 속도가 떨어지면 마치 내가 폭발할 것 같은 은연중의 불안함만 품에 안고 달린다. 그래서 목적지는 어딜까.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기사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까. 근데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지.
라는 생각들이 가중되고 있을 때 버스가 터미널에 멈췄다. 이제는 하차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생각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을 때, 버스 기사 아저씨는 착실하게 자신의 길을 달려오신 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말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덮었다 다시 펼 일이 없던 책은 그대로 가방에 넣고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목적지는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일까를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겨우 ‘집’이었나.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는 얽히고설킨 머릿속의 실타래를 푸는 걸 그만두고, 이어폰을 낀 채로 음악을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움직였다. 목적지로 가면서도 계속해서 내 최종의 목적지는 어딜까라는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나는 타고, 걷고,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연휴가 끝나고 어느새 내 삶도 다시 평소의 궤도에 올라오고, 가을에 맞게 기온도 떨어진 지금. 퇴근하고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여전히 브레이크를 언제 밟아야 할까를 생각한다. 어쨌든 언젠가는 멈추겠지.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지. 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카페 옆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키보드를 누른다. 아마 이 글의 목적지는 이곳인 것 같다는 생각을 안고 나는 이 버스에서 내린다. 누가 버스 기사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를 이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만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