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그 샘이 과도할 정도로 매섭다. 지난 주말에는 빗방울에 우박까지 섞여 어지러웠다. 일찍이 겨울옷들을 정리해 장롱 깊숙하게 박아 넣었던 부지런한 과거의 나까지 미워질 정도다. 어떻게든 봄 재킷으로 추위를 막으려고 하지만, 가래로 막을 걸 호미로 막는 격이니 어쨌든 추위가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도 비가 오는 밖을 카페 창가에 앉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비를 맞아 더 진해진 거리의 색들을 바라보면서 형형색색 우산을 쓰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구경하다 보면, 굳이 꽃놀이를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빗소리를 듣고 싶지만, 카페의 음악이 너무 커서 포기했다. 게다가 카페 점원의 선곡인지 모를 신나는 아이돌 댄스곡만 주야장천 나온다.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길까 했지만 4800원의 아메리카노 가격이 괜스레 아까워서 이어폰을 껴, 유튜브 뮤직을 뒤적거렸다. 무슨 노래를 선곡할까 고민했지만, 그냥 이리저리 듣기 좋아서 저장해 놨던 곡들을 모아둔 ‘자주 듣는 곡’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그때그때 대충 저장한 곡들이라 장르도 중구난방이다. 신났다가 축 쳐졌다가, 갑자기 헤드뱅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렬한 메탈 사운드까지 튀어나온다. 100곡이 넘어가는 곡들이라 정리하기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엉망진창이 된 플레이리스트에 귀를 맡기고 유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가끔씩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곡이 튀어나올 때는 진창에서 금괴라도 발견한 것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새소년의 ‘난춘’이 그 곡 중에 하나였다. 언젠가 일주일 내내 ‘난춘’만 주야장천 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곡이기에, 잠시 노트북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뿜은 담배 연기를 바라봤다. 습기 가득한 날이라 그런지, 담배 연기는 산등성이에 걸친 구름처럼 무겁게 내리깔렸다. 노래 역시 착 가라앉으면서 신림의 길거리가 마치 비 오는 영국 버밍엄의 밤처럼 축축하게 느껴졌다. 물론 영국 버밍엄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곳의 밤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른다. 그냥 당장의 감상이 그랬다는 의미다.
‘난춘’을 한곡 반복으로 걸어두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일에 집중했다. 여섯 번을 넘게 반복해 듣다가, 아예 새소년을 검색해 들어가 ‘전체 재생’으로 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 오는 날 듣는 새소년의 음악만큼 중독적인 게 없다. 특히 봄비가 내리는 날이 퍽 잘 어울린다.
내게는 계절별로 비가 올 때 듣는 제철 음악들이 있다. 봄에는 새소년, 여름에는 최백호, 가을에는 김광석, 겨울에는 콜드플레이의 초창기 음악들을 듣는다. ‘왜요?’라고 묻는다면, 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내 짧은 표현력으로는 음악의 감상을 풀어 설명하기 꽤 답답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그냥 듣기 좋아서요’라고 얼버무리지만 분명 어떤 명백한 이유들이 있을 터다. 물론, 굳이 공통점을 꼽아보자면 ‘사람 죽일 것처럼 가라앉는데 오히려 살리려 애쓰고 있는 곡들’이라는 감상을 남길 수 있겠다.
언젠가 ‘난춘’의 뮤직비디오에 달린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누리꾼이 적은 글을 염치없이 따오자면 이렇다.
“봄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라고 해요. 봄이 가져오는 생기와 시작하는 계절이라는 부담감이 우울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난춘도 같은 뜻을 가진 노래니까 이 노래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받으면서 조금만 더 살아보려는 생각이 들면 좋겠네요.”
처음 이 음악을 들었을 때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역에서 합정역으로 향하는 한강 철교 위였다. 해는 없고, 달빛도 구름에 가렸지만 서울의 건물들이 내뿜는 빛이 물결을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강 근처에 살면 그 막연한 어둠에 빨려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오른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지하철이 철교를 다 건너고 지하로 들어서며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때의 감상은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봤던 것과 같아서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다.
요즘은 ‘알고리즘’의 시대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으면 그 사람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확인해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정확한 건 그 사람의 플레이리스트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플레이리스트는 너무 어지럽기만 하지만, 그게 결국 나라는 사람이다. 자주 듣는 곡들은 축 가라앉아 있는 우울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신나는 음악도 듣는다.
지금은 여전히 새소년의 음악을 틀어두고 카페에 앉아 어딘가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이제 곧 해가 지고 찾아올 어둠을 기다리면서 키보드를 열심히 누른다. 매일 아침 ‘어쩌면 이렇게 살다가 의미 없이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하지만 늘 꾸역꾸역 의미를 만들어가려고 애쓰는 삶으로, 봄비 피하려고 쓴 우산들을 보며 꽃놀이라고 생각하면서, 참 어지러운 마음이라고 쓴다. 이제 따뜻한 봄 ‘난춘’(暖春)은 다 갔다고 꽃샘추위 탓에 재채기나 해대는, 그런 어지러운 봄의 어느 날, ‘난춘’(亂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