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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쓰기

야구 몰라요

by 안태현

"야구 몰라요, 경기는 끝나봐야 아는 겁니다."


평생 야구를 바라보고 살았던 故 하일성 해설위원은 야구 중계를 할 때면 이 말을 늘 입에 올렸다.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던 팀의 팬들에게 그 말은 희망이 됐고, 앞지르고 있던 팀의 팬들에게는 긴장감이 됐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정말 끝난 줄만 알았던 경기의 흐름이 갑자기 뒤엎어질 때도 부지기수였고, 그럴 때면 모두가 하일성의 이 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다.


역전 만루 홈런 한 방이면 언제 흐름이 바뀔지 모르는 게 야구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누군가의 역전 안타가 나오고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강우 콜드가 선언이 되기라도 한다면 허무하게 경기가 끝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 경기 졌다고 낙담하기에 이르다. 시즌 동안 100경기가 넘게 치러지면서 1위였던 팀이 중위권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우승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팀이 뒷심을 발휘해 시즌 후반에는 ‘가을 야구’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럴 때면 “야구 모른다”라는 말이 절로 입에서 나온다.


야구팬들이라면 가장 설레는 때가 봄과 가을이다. 시즌을 시작하는 개막전을 기다리면서 ‘과연 우리 팀은 이번 시즌의 초반부를 어떻게 장식할까’라고 기대하게 된다. 시범경기를 보면서 실망하다가 막상 개막전의 모습을 보면 그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가을이 다가올 때면 중위권의 싸움이 치열해진다. 이미 가을 야구 진출을 확정한 팀들은 꾸준히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중위권 팀들은 어떻게든 5위 안에 들기 위해 각축전을 펼친다. 5위와 6위 팀의 성적이 비등할 때, 팬들은 가슴을 졸인다. 5위 안에 든다면, 운이 좋아 플레이오프까지 오를 가능성도 생긴다. 데이터에 따르면 보통 시즌 1위나 2위가 그해의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될 확률이 높지만 ‘야구는 정말 모른다.’


지난 주말, 10개의 팀이 가을을 향해 뜀박질을 시작했다. 시범경기를 지켜보는 동안, 내가 응원하는 팀의 전력에 고개가 갸우뚱하기는 했으나 개막전 때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어쩌면 올해 우승도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글쎄, 그건 가을이 되어봐야 아는 일이다.


개막전을 내리 졌다고 실망하는 팬들도 있다. 그러나 144개 경기에서 2개 졌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어차피 작년에도 우승 못했지만 올해도 꾸역꾸역 야구를 보고 있지 않나. 그거면 됐다.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웃을 날은 온다. 어떤 팀은 29년 만에 한국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지 않나.


가수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의 곡 ‘스끼다시 내 인생’에는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스끼다시 내 인생’이란 가사가 있다. 지난 2003년에 나온 앨범의 수록곡이었으니 벌써 나온 지 22년이 지났다. 그의 노래가 늘 그렇듯 참 암울한데, 그래서 위로를 얻게 된다. 저 가사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그 덕분에 많은 ‘스끼다시’ 인생들이 위로를 받았다. 메인 요리가 되지 못한 밑반찬 인생이라서, 늘 메인 요리가 되기를 꿈꾸는 인생들이란, 그런 노래라도 희망이 된다.


하지만 재밌는 건 그 당시 횟집의 스끼다시로 나오던 콘치즈가 어느 순간부터는 술집의 단골 안주가 됐다는 점이다. 이제 밑반찬이 아닌 당당히 메뉴판에 이름을 올린 콘치즈는 비록 사시미는 되지 못했어도 어디 가서 꿀릴만한 존재감은 아니게 됐다.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도 콘치즈를 좋아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의 사후 13년 후 그가 열렬히 응원했던 LG트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는, 그 역시 저 멀리 하늘에서 꽤 좋아했을 거라 생각한다. 우승 당시 흘러나왔던 그의 곡 ‘축배’ 속 가사처럼 “뜨겁게 빛나는 우리 젊음과 청춘에 잔을 높여라 아낌없이 마셔라, 축배를 들어라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향해서 축배를 들어라”라고.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도 자신의 곡이 LG 트윈스 우승을 상징하는 곡이 될 줄 알았을까. 스끼다시도 돈 받고 파는 안주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니, 상상은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몰랐을 거다. 세상을 떠나고 13년이 지나도 자신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렇게 많을 거라는 걸. ‘스끼다시 인생’이라는 가사를 쓴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시미’였다는 걸. 그러니깐 야구나 인생이나 정말 모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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