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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Oct 20. 2022

오류투성이, [ERROR]

듣다 보면 사람 기분 참 뭣같이 만드는 앨범들이 있다. 콜드플레이의 초창기 앨범이나 스티브 레이시의 <Gemini Rights>, 조지의 <NECTAR> 같은 부류의 앨범들. 듣다 보면 사람 기분 우울하게 만들기 딱 좋다. 결국 그런 앨범들을 계속 돌려 듣다 보면 우울증 말기 환자처럼 휘청거리게 되는데, 막상 또 행복한 기분을 채워주는 앨범을 들으면 금방 휘발되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악뮤 이찬혁이 솔로 앨범을 냈단다. 그럼 들어봐야지. 타이틀곡 <파노라마>부터 들어봤다. 도입부는 요즘 유행하는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깔렸다. 그럼 그렇지. 더 위켄드가 생각나기도 하고, 요즘 나오는 레트로풍의 노래겠지 싶었다. 과거형이라는 건, 결국 이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정말 기분 뭐 같아졌다'는 걸 뜻한다. 내가 앨범 리뷰를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앨범 전체를 다 듣고 나서는, 이건 꼭 써재껴야지 싶었다.


앨범 제목은 [ERROR]다. 첫 트랙 <목격담>을 듣자마자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전작인 악뮤의 <낙하>에서 그렇게 낙하하더니 '커다란 소리'와 함께 결국 추락해버렸구나. 그런데 이 심각한 상황과 달리 깔리는 신나는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꼴 보기 싫었다. 노래가 앨범 제목 따라간다고, 그냥 오류투성이로 느껴졌다. <Siren>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러다 <파노라마>를 만나게 되면 이 오류가 과연 오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말마로 터져버리는 울음과 함께.


확실히 내 몸이 삐걱거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니다. 이찬혁의 몸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게 더 맞겠다. 그가 써 내려간 음표와 그걸 불러대는 목소리는 애써 밝은 척하지만 가사 속에 암울함을 숨겨대고 있다. 이런 어떠한 한 존재의 오류를 바라보다 보면, 결국 나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오류들을 마주하게 된다. [ERROR]는 그러한 부류의 앨범이다. 한 존재가 죽음에 대해 달려가고 싶어 하면서, 삶을 향해 미련을 가지는 오류를 바라보게 하는 앨범이다.


흔히들 철학적이라고 말하는 음반들은 어렵거나 껄끄러운 음악 소리에 진입장벽이 높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어내는 존재 자체가 철학적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듣기 어렵지 않아도, 굳이 해석을 하지 않아도 음악을 듣다 보면 존재의 흔적들이 묻어져 나온다. 악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악뮤, 그리고 이찬혁이 된 그 스스로의 행보만큼이나 앨범의 트랙들이 밟아가는 과정이 그러하다. 과연 그가 데뷔 후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감정들을 느껴왔고,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는 이찬혁이라는 존재에 동화되어 간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은 모든 것을 휩쓸고 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찰나의 고통은 그저 찰나로 지나갈 뿐. 하지만 천천히 차오르는 수위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하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의 고통까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한다. 과연 이 숨 막힘이 어디까지 나를 삼켜버릴까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도 한다. [ERROR]의 수록곡 한 곡, 한 곡들을 밟아가는 나의 발걸음도 무겁다. 당장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버린다면 편해질 나의 마음이지만, 굳이 그 두려움 속으로 파고들게 만드는 건 나의 욕심 때문인지, 이찬혁의 욕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가끔 우리는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남겨질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죽은 뒤에 남겨질 흔적들을 생각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쌓아갈 흔적들은 무엇이 있을까. 한 줌의 재가 되는 나의 육체 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되돌아본다. 한낱 사람과 사랑, 우정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죽은 뒤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돈에 집착한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는 뒤엎어지는 컵 속의 물과 같아진다. 태어나서 조금씩 증발되어 가는 나라는 존재 의미의 가치와, 죽으면서 결국 엎어져 버리는 물처럼 존재는 의미 없고 부질 없다.


그런데도 이찬혁은 삶에 대해 미련을 가지는 게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그 아름다움을 내보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대신 죽어준다. <장례희망>에서 할렐루야라고 찬양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이지만, 여전히 삶을 붙잡으려는 미련을 보이는 것만큼 찌질하고도 성스러운 게 없다 싶다.


죽음 뒤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다들 떠들어대지만, 과연 천국이 있을지 지옥이 있을지 아무 것도 없을지는 죽어봐야지만 안다. [ERROR]는 그래서 오류다. 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죽어본 것처럼 얘기한다. 그러면서 '너도 죽어보고 싶지 않니?'라고 말하면 어디 덧나나. '그러니깐 죽지 말라'고 얘기하니깐 더 짜증이 몰아친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라고 역정을 내면서도 그의 앨범을 다시 듣는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ERROR]를 고평가하지 않는다. 어느 싱어송라이터의 실험적인 곡들이자, 요절을 꿈꾼 한 젊은 아티스트의 치기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이건 정말 인정해야겠다. 그저 7평 남짓한 원룸에서 돈 많은 어느 젊은 아티스트가 만든 죽음에 대한 푸념과 절망, 희망을 들으면서 청승을 떨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나의 질투일까. 하지만 음악을 만들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질투부터 하고 있는 나의 감정 자체도 명백한 오류인 것은 분명하다. 한동안 이 앨범을 듣고 느낀 뭣같은 기분은 아주 신나는 노래를 들어도 휘발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더욱 암울해진다. 


어쨌든 이런 오류들을 안고 나는 다시 이찬혁과 함께 저 희망찬 사후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절망의 삶을 살아보려한다.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게 스쳐'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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