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을 치는 남자
영화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나의 장점 아닌 장점은 쓸데없는 호기심을 파고드는 것에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보통 호기심이라는 것이 생기면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거나 혹은 직접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이 대다수다. 허나 나의 사고체계는 정보를 찾기 이전에 먼저 내 생각의 끝 지점까지 가서 혼자만의 확답을 내리고 시작한다. 덕분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엉뚱한 답을 내려버려 ‘또라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리곤 했다. 더불어 그 탓에 오히려 정보를 찾고 나서 그 해답이 너무나 허무맹랑하게 풀려버렸을 때, 큰 허탈감을 느껴버리기도 한다. 그 허탈감이라는 건 대개 내가 생각한 것이 ‘틀린 것’이었을 때 더욱 크게 다가온다. 하여튼 이러한 장점(무모하게도 나는 이것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이 또다시 발현되었다. 이번에 질문은 “피아노 건반은 왜 흰색과 흑색으로 이루어졌을까”다. 잠깐, 지금 당장 글을 다 읽지 않고 이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을 그만 두시길 부탁드린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양해 부탁드린다. 왜냐하면 이 글의 대부분은 앞서 말했듯이 ‘엉뚱한 해답’을 내놓을 테니깐 말이다.
사진과 영화가 최초로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이 담고 있는 색채는 흑과 백 뿐이었다. 그것을 기술 발전의 문제라고 치부하더라도 나는 이것이 꽤나 앞선 질문에 근접한 힌트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깐, 세상이 천연색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흑과 백이라는 근원적 색채가 기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해답의 근거는 이렇다. 흑백을 나타내는 명암이라는 건 빛이 있고 없고를 우선 따진다. 강한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고 아무 빛도 없는 것은 당장 눈이 먼 것 같이 검다. 다시 그러니깐, 흑과 백은 그 중간, 회색 지대가 아닌 이상 어떠한 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극과 극의 세상은 천국과 지옥이란 또 다른 개념의 세상으로 만들어졌다. 회색지대는 단연 여기 연옥이다. 허나 피아노의 건반에선 회색 지대가 없다. 오로지 흑과 백으로 나뉜다. 이렇게 극단적인 악기에서 천상의 음악이 나온다는 건 꽤 아이러니하다. 건반에 대한 이야기를 내놨지만, 이건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 이건 영화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건반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연옥에서도 흑과 백의 세계는 존재한다. 주인공 톰은 흑의 세상에 몸담고 있다. 부동산 업자라는 허울만 좋은 울타리의 직업 안에서 그는 입주민들을 쫓아내기 위해 아파트에 쥐를 풀어버리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이는 흑의 유전자,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림자의 영향이다. 그림자의 주체인 아버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톰을 더 범죄의 늪으로 끌고 들어오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삶에서 톰은 음악이라는 백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길 원한다. 그런 그의 마음은 지나가던 죽은 어머니의 옛 동료를 붙잡는 것에서 표출된다. 그의 어머니는 음악에 몸 담았었던 사람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톰이 살던 암흑의 세계와는 먼 양지의 세계인 백의 세계로 말할 수 있다. 톰은 이렇게 백과 흑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회색의 인간이다.
톰이 흑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막연하게 시립 음악단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톰은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인 여자 미아오에게서 다시금 피아노 연주를 배운다. 그의 연주는 형편없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분노를 외부로 계속해서 표출해낸다. 흑의 기운이 아직까지 그를 잠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톰은 피아노를 친다. 웃통을 벗어버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가슴털을 장식으로 두고 그는 계속해서 바흐의 <토카타 E 단조>를 연습하고 연습한다. 하지만 더욱 더 이 영화가 슬퍼지는 이유는 그는 어떠한 재능도 없고 음악적 성취를 이루지도 못하는 것에 있다. 당연히 그는 시립 음악단의 오디션에서 연주를 망치고 떨어진다. 허나 톰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구석이 있으니, 그는 더 이상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이때,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다. 러시아인이 쏜 총탄에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톰은 오열한다. 톰에게 있어 흑과 백은 서로 경멸하고 침해하는 지점이 아닌 하나의 통합된 유전자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2년이 흘러, 톰은 피아니스트가 된 미아오의 매니저가 된다. 미아오의 연주회 날, 운명의 장난이 아닌 영화의 극적 장난처럼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인이 톰의 눈앞에 나타난다. 톰은 러시아인과 혈투를 벌이곤 그를 죽일 수 있는 상황까지 맞는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인을 죽이지 않고 돌아와 미아오의 연주회를 감상한다.
[다시, 건반 이야기]
이쯤에서 피아노 건반의 이야기를 다시 끌고 들어와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은 내가 정의한 것이 아닌 본래 있는 건반의 정의니 안심하시라. 우리가 생각하는 피아노 건반은 백이 기본음이고 흑이 반음이다. 상아와 흑단이 특히나 온도나 습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여 연주 할 때 촉감이 좋고, 땀 흡수가 좋아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어 건반에 쓰였다. 그러나 상아가 흑단보다 비쌌다. 그렇기에 초기의 피아노나 피아노의 전신인 쳄발로는 기본음이 흑이었고 반음이 백이었다. 허나 후기에 아크릴과 셀룰로이드가 개발되면서 흰 건반의 생산비용이 더 싸졌고 흰 건반이 기본음이 되었고 검은 건반이 반음이 되었다. 물론 이보다는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함이 더 컸다. 설 중에는 부자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상아가 더 많이 들어간 백 건반을 기본음으로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역시나 나의 생각은 또 엉뚱함 그 자체였다.
[흑과 백, 그리고 회색]
톰은 연주회로 돌아온다. 피 묻은 셔츠를 입고 미아오가 연주하는 음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는 어떻게든 건반을 치고 있다. 러시아인을 죽이지 않은 것은 흰 건반의 세상에 돌아 온 톰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톰의 세상에 완전히 검은 건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결국 아름다운 연주는 기본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음과 어우러졌을 때 나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는 흑과 백이 있지만 그것이 극명하게 나뉘지 않은 회색 지대, 연옥이다. 대비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모두에 슬퍼하고, 복수하고 싶지만 용서하고도 싶은 두 가지 마음의 대비도 있다. 일단 기본음을 치지만 있지만 언젠가 반음도 쳐질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한다. 이건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음의 탄생이다. 일단 톰은 계속 손가락을 움직인다. 연주한다. 그렇게 살아가고, 우리 역시 살아간다. 흑과 백으로 나뉜 이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