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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났던 배우 최진실, <장밋빛 인생>(2005)

by 안태현

열네 살의 나에게,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멋졌던 배우가 누가 있냐고 물어본다. 그 시대의 나는 다섯 명의 배우를 답한다. 이정재, 정우성, 장동건, 고소영, 그리고 최진실이라고. 왜 최진실이냐고 한다면, 이유도 필요 없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거다. 최진실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다. 영화 <마누라 죽이기>는 물론이거니와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는 최진실이라는 배우를 정말 빛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런 최진실도 잠시, 부침을 겪은 때가 있었다. 굳이 그의 개인사를 끄집어내기는 싫으나 언급해야 하는 드라마가 드라마이니 만큼 어쩔 수 없이 글로 끌어들이는 마음이 무겁다. 2000년 12월, 최진실은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꾸준히 많은 대중지표에서 최진실은 ‘국민 배우’로 뽑혀왔다. 그러나 2002년 12월 남편 조성민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혼을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는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모두 재판정에서 거짓임이 드러났다. 재판이 모두 끝나고 최진실은 잃었던 명예를 다시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대중들에게 그간 쌓여왔던 이미지에는 큰 타격을 입은 후였다.


일련의 힘든 상황을 버텨내고 최진실은 2004년 MBC <장미의 전쟁>으로 드라마에 복귀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시청률 성적은 나오지 못했다. 항간에서는 ‘최진실의 시대가 끝이 났다’라는 말들도 나왔다. 그 말들은 세간의 평가가 됐고, 세간의 평가는 최진실을 나락으로 끌고 가려 했다. 늘 입이 문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진실은 과감하게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 기존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되어버리기로 했다는 결심이었다. ‘여배우’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는 나이지만, 그 시대에 맞춰 얘기해보자면 ‘여배우’가 ‘아가씨 연기’를 하다가 ‘아줌마 연기’로 넘어간다는 것은 절치부심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아줌마’가 되어야 한다는 건, 남자들 입장에서는 ‘오빠’ 소리 듣다가 ‘아저씨’ 소리 듣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당시 여성 배우들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아줌마 연기를 한다는 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아줌마로 변신한 최진실의 모습이 2005년 방송된 KBS 2TV <장밋빛 인생>에 담겼다. ‘최진실의 시대는 끝이 났다’던 세간의 평가는 <장밋빛 인생>을 통해 ‘최진실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로 바뀌었다. 힘들고 아팠던 시간을 견뎌내고 돌아온 최진실의 완벽한 부활이었고, 화려한 귀환이었다.


KBS 2TV <장밋빛 인생>


지금은 막장 드라마 작가라고 불리는 문영남 작가지만, 문 작가는 막장요소를 잘 조합하는 것 외에도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좋은 필력을 가진 인물이다. 시청자들의 흥미를 잡아끄는 설정과 서사 전개 방식은 문영남 작가가 가진 최고의 특기라고 할 수 있겠다. 문영남 작가의 특성상 <장밋빛 인생>도 다소 막장스러운 전개가 펼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기본 골자는 평범하다. 이렇게 쓰지만 이 드라마는 가정에 관심 없는 남편 탓에 혼자서 두 자녀를 업어 키우던 여자가 시한부 삶을 살다가 결국 암으로 죽게 된다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감정을 다룬다.


<장밋빛 인생>은 첫 시작부터 로그라인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시작했다. 무슨 이런 자신감을 가진 드라마가 있나 싶지만, 그 자신감만큼이나 파격적인 전개로 문 작가는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여기에 그간 MBC 전속배우로 활동해왔던 최진실이 현실적인 아줌마 역할로 KBS에 나온다니. 화제성은 이미 보증수표를 가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화제성은 주연 배우 최진실, 손현주의 호연과 함께 폭발적 시청률로 직결했다. 종영 당시 최고 시청률은 41.5%로 집계되기도 했었다. 대한민국 가정의 절반은 <장밋빛 인생>을 보고 있었다는 거였다.


이야기는 로그 라인과 동일하다. 맹순이(최진실 분)는 억척스러운 면이 가득한 인물로, 가정에 관심이 없는 남편 대신 두 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결혼 10주년을 맞는 날, 남편 반성문(손현주 분)은 맹순이에게 자신의 외도를 고백한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여기에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온다. 바로 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아버린 것. 맹순이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이들을 지키려 하고, 결국 그런 의지 덕분에 반성문도 이름대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맹순이의 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맹순이의 암은 완치가 쉽지 않다. 결국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녀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반성문은 이제 아내 맹순이에 대한 미안함을 마음에 간직한 채 남은 자녀들을 자기가 잘 보살피겠다고 결심한다.


Cap 2023-03-02 17-55-15-392-vert.jpg KBS 2TV <장밋빛 인생>


동 시기에 시한부 인생을 다루는 다수의 드라마들이 등장했으나, <장밋빛 인생> 만큼 내게 큰 충격을 준 드라마가 없다. 특히 맹순이가 항암 치료를 받던 중 엄마에게서 안 좋은 냄새가 난다는 자녀의 이야기를 듣고 욕실에서 치열하게 목욕을 하던 장면은 너무 강렬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소중한 사람에게 외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자기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자기혐오감을 목욕을 하면서 씻어내겠다는 발악은 맹순이가 가진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였다. 소중한 사람에게 외면당하기 싫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곁에서 떠나기 싫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처절함의 발악은 너무 슬펐다.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냉혈한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 장면을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내 주변에는 여전히 심장이 뜨거운 사람들이 많다.


방영 당시에도 큰 사랑을 받았던 <장밋빛 인생>. 하지만 3년 뒤 이 드라마는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 때문에 재조명을 받게 됐다.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만인의 연인이라고 불렸던 배우 최진실이 대중의 곁을 떠나면서다. 만우절, 비운의 삶을 마감했던 장국영처럼 당대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는 이들의 삶은 너무나 빠르게, 또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다.


장미는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뾰족한 가시 탓에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 최진실의 삶도 그러했다. 정말 아름답지만, 그 뾰족한 가시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이들이, 던진 상처의 말들이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사실 그의 가시는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향해 있었음에도 최진실이라는 장미는 언제나 활짝 피어 있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힘든 상황에도 언제나 연기에 열중했으며, 배우로서의 삶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위로를 전해주려 했다. 하지만 익명의 입에서 시작된 말이, 대중이라는 탈을 쓸 때 그 장미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쉬운 표적이 된다.


맹순이가 암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아야 했다면, 최진실은 ‘말’로 끝없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전 남편과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서 고통을 마감했다고 생각한 때, 최진실을 향한 무성한 소문들이 또 생겨났다. 이번에는 친한 연예인에게 돈을 빌려줬고, 그 채무 관계로 인해 관계가 악화됐다는 소문이었다. 장미의 화려한 잎에 무수한 말들이 뱉어낸 오물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겨우 오물을 씻어냈다고 생각했던 때에, 다시 그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생기는 감정은 패배주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상처를 보듬는 데에 힘을 써야한다. 하지만 ‘익명의 입’들은 겨우 아문 상처를 다시 헤집어 나 고통스럽게 곪아가도록 만들었다.


한 배우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출연한 작품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건 너무 아픈 일이다. 내게는 <장밋빛 인생>이 그런 드라마다. 누군가가 세상과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건 꽤 슬프고 고단하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체화해야 하며, 시청자들도 정이 든 한 인물과 이별을 해야 하는 일을 차츰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필연이어서 더욱 심장을 시큰하게 만든다.


Cap 2023-03-02 17-56-50-853-vert.jpg KBS 2TV <장밋빛 인생>


아쉽게도 최진실은 이별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작별은 언제나 사람을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 그 시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다. 한국 사회에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조명받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갑작스러운 작별을 견뎌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 작별을 견뎌내지 못한 또 다른 상처 받은 영혼들도 그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일련의 상황들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충격은 너무나 컸고, 그만큼 상처도 컸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떠난 이를 위해서라도 버텨내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아파했는지에 대해 돌아봐야 했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한 송이의 장미가 지고 나서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별을 맞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고 후회했다. 그 후회야 말로, 최진실이라는 장미에 가시 돋친 말을 찔러댄 개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다.


돌아보면 달라진 것이 있나 싶기도 하다. 여전히 수많은 입들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옮겨대고 소문을 만들고, 소문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둔갑시킨다. 최근에는 유튜브에서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친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경우는 부지기수고, 그 가짜뉴스만 믿고 사실 확인이라는 간단한 과정도 거치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의 댓글들이 판을 치고 있다. 연예인에 대한 심한 모욕의 댓글을 막기 위해 포털 연예 기사들의 댓글 기능을 차단했지만, 이제 ‘익명의 탈’을 쓴 이들은 연예인들의 개인 SNS에 찾아가 모욕의 댓글을 단다. 사람 세 명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데, 그 무수한 입들이 모여서 사실도 아닌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짜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짐은 오히려 거짓에 피해를 본 당사자가 짊어져야 하는 사회가 됐다.


지난 2019년, 최진실의 11주기를 맞아 그의 묘역을 다녀왔다. 취재라는 명목이었다. 연예 기사를 쓰는 나에게도 조그마한 부채의식이 존재했다. 그래서 죄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취재를 하기 전, 우선 그의 묘역에 고개를 숙여 추모의 뜻을 전했다. 그런 나의 조그마한 정수리를 바라보는 건 한 손에 턱을 괴고 있는 활짝 웃고 있는 최진실의 얼굴이었다. 묘역에 새겨진 젊은 날의 최진실은 여전히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최진실이 떠나고 나서야, 그의 삶을 두고 <장밋빛 인생>이라고 쓰고 있다는 것은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활짝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 앞에서 울상을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또 다른 장미가 세상의 입들에게 상처받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게 그를 떠나보낸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의무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당신의 몫만큼 <장밋빛 인생> 같은 삶을 만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보잘 것 없는 나라도, 쉽게 오물을 뱉는 입을 가지면 안 되겠다고 마음에 새겼다. 그러면서 지금 당신이 없는 삶의 슬픔만큼이나 행복해져야 하겠다고 감히 말한다. 행복해진다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생각해볼 여유가 생기겠지. 그렇다면 결코 또 다른 <장밋빛 인생>의 끝을 보지 않겠지. 이렇게 쓰며, 겨우 당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정말 찬란하게 빛났던 배우, 장미, 그리고 최진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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