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를 지나면서 가장 열정을 보였던 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규정할까였던 것 같다. <천국의 계단>은 나의 꼬인 성격을 더 꼬이게 만들어,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 영원할 수 없다고 규정하게 만들어서 꽤 암울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면, 삶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기에 ‘끝’이라는 게 온다는 걸 굉장히 불안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결국 <천국의 계단> 속 차송주(권상우 분)는 한정서(최지우 분)와 이별을 하게 됐고, 그게 그의 삶의 어떠한 한 장(章)을 장식한 마지막이었다.
열세 살의 나는 사랑을 해보지 않았고, 사랑을 할지도 모르는 시기였기에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귀납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일거야’라는 가정을 세워놓고 연역적으로 풀이를 해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나는 그 가정을 함께 연구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당장 ‘누굴 좋아한다.’라고 느낀 적도 없었거니와,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부터 머릿속에 장착하고 다녔기에 그 조차도 어려웠다. 항상 머릿속을 채우는 건 ‘물음표’였고, 느낌표가 도출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물음표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더 많은 책들을 읽고 다녔다.
그래서 나는 뭣도 모르고 도서관에서 어려운 책들을 집어 들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이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라는 물음표에 해답을 찾기 위해 프로이트가 쓴 『꿈의 해석』을 집어든 것이었다. 당연히 그 나이에 그걸 이해하는 거란 쉽지 않았다. 초반의 몇 페이지를 읽다가, 현란한 프로이트의 문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책을 반납했다. 내 정신을 어떻게 판단해야하는가를 생각하고 펼쳐든 책에는 다른 이의 정신을 판단하려 노력했던 프로이트의 깊숙한 사고가 들어있었다. 이제 초등교육 과정을 밟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 방대하고 어려운 주제였다.
이런 일은 이 시기에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뭔가가 궁금해지면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펼쳐들려고 노력했다. 특히 법이 어떻게 동작하는지가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나는 교과서를 들여다보지 않고 도서관에서 헌법책을 빌려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 헌법책을 더듬더듬 읽고 있던 나를 본 어머니는 나중에 판사나 검사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었다고 후에 내게 밝혔다. 나도 나름, 이거 공부하다가 나도 그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오만방자한 생각인가. 그런 셈이라면, 『코스모스』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위대한 천문학자가 되어있어야 했다.
하여튼 다시 ‘사랑’으로 돌아와서 어려운 책들을 읽던 나는 SBS <파리의 연인>을 만나게 됐다. 어려운 이론서를 읽는 것보다 소설을 읽으면서 고민을 작가와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수월하듯이, 인생에 대한 어려운 주제는 드라마를 보면서 고민해 봐도 좋을 문제였다. 사실 <파리의 연인>을 본 게 그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어머니가 보는 걸 따라봤다. 그런데 원래 인생은 어쩌다 만난 기회에서 바뀌게 된다. <파리의 연인>이 내게는 그랬다. 이 드라마를 쓴 김은숙 작가는 내게 처음으로 ‘사랑이 이런 걸 수도 있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 사람이었다.
지금도 김은숙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설렌다. <온에어>, <시티홀>,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등 내놓는 작품마다 히트를 치는 작가이니, 이보다 대한민국 시청자들이 사랑하는 드라마 작가가 있을까 싶다. 특히 소위 ‘신데렐라 서사’라고 불리는 요소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김은숙 작가는 ‘꿈같은 사랑’을 추구하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 중에는 나도 포함됐다. 근데 그가 <파리의 연인>을 통해 그려낸 꿈같은 사랑은 조금 달랐다. 그러니깐, 김 작가는 <파리의 연인>에서는 꿈같은 사랑을 진짜 꿈으로 만들어버렸다. “애기야 가자.”라고 말하면서 강태영(김정은 분)의 팔을 잡고 나서는 한기주(박신양 분)의 모습을 통해서다.
일단 <파리의 연인>을 보지 않았다거나, 그 결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은 이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PTSD를 유발할 수 있기에 이렇게 경고를 한다. 하지만 다 안다. 그럼에도 이 글을 보겠다는 사람은 어차피 본다는 걸.
모든 설명을 다 때려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파리의 연인>의 결말은 ‘짜잔, 이건 다 소설이었습니다.’였다. 운명처럼 사랑을 시작한 한기주와 강태영. 그 속에서 수많은 고초가 있었지만, 그들은 사랑을 쟁취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나서 <파리의 연인>이다. 그런데 강태영은 사실 꿈을 꿨다. ‘그런 사랑이 있겠지.’라면서 말이다. 그 꿈을 소설로 옮겼다. 그 내용이 이 드라마다. 원래 벌어지지도 않은 것이라니. ‘알고 보니 다 꿈이었습니다.’라는 허무한 결말이 이처럼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준 경우는 당시 한국 드라마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였다. 덕분에 김은숙 작가는 50%의 시청률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
결말을 제외하고서 이 드라마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정말 설렘 그 자체다. 지질한 삶을 살아가던 강태영이 언제나 완벽한 삶을 살아왔던 재벌 한기주를 만난다. 언제나 엉뚱한 행동으로 지적을 받는 강태영에게 한기주는 그야말로 최고의 보조자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라면서 버럭버럭하는 성격도 있지만, 그 말 속에는 “내가 너의 남자다”라는 부드러움이 녹아들어있는 남자이기도 한 게 한기주였다. 나쁜 남자이면서도, 다정한 남자. 남자인 나도 끌리게 만드는 게 바로 한기주였다. 그렇기에 여전히 <파리의 연인>을 인생 드라마로 떠올리는 사람들은, 결말을 기억 속에서 미화시키고 ‘나도 저런 사랑을 해봤으면.’이라고 꿈꾸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결말이 떠오른다. ‘야 이거 다 꿈이야.’라면서 꿈같은 사랑을 믿었던 사람들의 로망을 완전히 박살내 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도 나는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볼 때면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머리에 붕대를 감는다. 아닐 때도 있지만, 그럴 때가 더 많았기에 매번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볼 때는 머리에 감을 압박붕대를 준비한다. 차라리 그걸로 눈을 가리고 안 봐도 될 텐데, 굳이 그의 드라마를 찾는 건 여전히 꿈같은 사랑을 믿는 나의 의지다.
<파리의 연인>이 내게 가르친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기에 앞서서 과연 한기주를 향한 강태영의 시선이 무엇일까부터 내 생각을 설명해야겠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강태영은 그의 재력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일까, 혹은 한기주라는 존재 자체에 빠진 것일까.’다. 세상을 늘 삐뚤게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교정하려 노력하지만, 이런 주제에서는 항상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강태영은 한기주라는 사람에게 빠져든 것이 맞다. 그가 내보이는 당찬 태도는 강태영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가 자라온 환경 덕분인 것도 있다. 언제나 당찰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어려서부터 누구에게 무시 받지 않는 재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환경이 강태영이 한기주에게 빠져든 이유였다.
강태영이 한기주에게 빠져든 것처럼, 한기주도 강태영에게 푹 빠져든다. 그리고 강태영 앞에서만은 한없이 여린 한기주를 보면서 사랑의 강력한 힘은 누군가가 평생 지키고 살았던 자존감과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기제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하게 됐다. 김은숙 작가는 이런 사랑의 힘을 아주 적절하게 그려내는 재능을 가졌었고, 그가 쓴 드라마를 보던 나는 ‘아, 사랑이란 사람을 강하게 만들 수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구나.’를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그의 드라마들을 ‘신데렐라 서사’라고만 치부해버리기에는 아쉬운 거다. 김은숙 작가가 그려내는 사랑이란, 위대하다. 적어도 김 작가에게 사랑을 배운 나에게는 그렇다. 나의 스승이 가르쳐준 사랑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내 스승님이 쓴 <파리의 연인>은 이별을 맞기는 하지만, 그 이별조차도 위대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랑을 꿈꾸고 쟁취한 이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서, 너무 그래서, 결말을 상상으로 끝내버리는 건 정말 아팠다. 김 작가는 아무래도 “야 이놈들아! 세상에 이런 사랑은 없어!”라고 훈계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맞다. 스승에게 사랑에 대한 완벽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한 나는 여기서 그 가르침이 혹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까.’를 깨달은 거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원래 한기주와 강태영의 이야기는 김은숙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드라마 속의 상황이 그냥 상상이라고 한다면, 원래부터 이 드라마의 상황은 김은숙 작가의 상상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이 진짜라고 믿게 되고, 그들의 사랑이 상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걸 힘들게 만드는 게, 드라마가 가지는 힘이다. <파리의 연인>은 드라마가 가진 이러한 힘을 확실하게 휘두르는 작품이다. 우리가 늘 꿈꾸는 사랑 이야기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 그러면서 시청자들 스스로도 그런 꿈같은 사랑을 현실에 대입해보거나 해볼 수도 있겠다는 희망과 원동력을 가지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그래서, 스승님 결말을 어떻게 상상으로 끝낼 수 있냐고요!
이런 원망이 있지만 내게 다시 <파리의 연인>을 볼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난 기꺼이 보겠다고 답하겠다. 결말을 알고 있더라도, 그 결말이 어떤 슬픔과 회한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파리의 연인>을 다시 보겠다. 왜냐고? 결말보다 소중한 건 과정 아니겠나. 이 원망스러운 결말로 달려 나가면서도 열렬히 사랑하고, 열심히 서로를 아끼려고 하는 한기주와 강태영의 이야기가 설렘과 행복을 줬기 때문이다.
김은숙 작가님, 아니 스승님이 내게 내려준 가르침은 사실 ‘사랑이 이런 거일 수도 있는데 꿈 같은 이야기야’라는 게 아니었다. ‘이런 사랑도 있는데, 이런 사랑이 끝을 맞는다고 해도, 또 상상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행복이 의미가 있는 거야’라는 가르침이었다.
만남 뒤에는 항상 이별이 있는 법이다. <천국의 계단>은 죽음으로, <파리의 연인>은 꿈으로 그 이별들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두 드라마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다른 것은, 과정의 문제다. 사랑의 순간은 영원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그 순간의 과정들은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 그 행복의 소중함을 가르쳐준 게 바로 <파리의 연인>이었다. 나는 덕분에 사랑을 해보지 않았음에도 ‘사랑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라는 사랑의 감정을 느껴봤던 거였다. 그게 드라마가 내게 인생을 가르친 방식이었다. 대신 사랑을 해주는 한기주와 강태영, 그리고 그 사랑의 과정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게 이럴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그리고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이었다.
<파리의 연인>을 통해 사랑을 배운 나는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연애를 해봤고, 그 속에서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또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별도 맞았었다. 그러면서 심하게 열병을 앓기도 했으며, 상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의 연인>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은 나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했다. ‘언제든 뒤통수 맞을 수 있어’가 아니라, 사랑의 끝이 와서 그게 일장춘몽을 꾼 것처럼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열렬하게 사랑을 했다면 의미가 있다는 유산이었다. 내 사랑이 꿈처럼 사라졌더라도, 그 사이에 나와 그 상대가 행복했고 성장했다면 ‘사랑’ 그 자체는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에 대한 물음표는 여전히 존재한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다. 김은숙 작가가 내게 알려준 사랑 외에도 정말 많은 사랑이 존재하고, 그 중에 하나의 사례가 나였기에, ‘사랑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표는 꺼지지 않을 촛불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건, 사랑을 해야지만 그 물음표를 채울 수 있다는 거다.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쉼표와 온점을 찍을 수 있는 사랑을 해봐야 한다. <파리의 연인>은 결국 상상이고 꿈이지만, 사랑에 있어 내게 좋은 교과서가 됐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겠다.
인생은 드라마다. 인생을 담아낸 것이 드라마지 그럼 뭐가 드라마냐고 하시는 분들에게 ‘인생 자체가 드라마 그 자체다’라고 반박해보지만 논리가 맞지는 않는 것 같다. 어려운 개념으로 가득 차있는 이론서를 읽는 것보다 언젠가는 그것과 비슷한 주제로 쓴 소설이 더 많은 생각을 전해줄 때가 있다. 인생을 담아낸 것이 결국 드라마라면, 인생에 대한 궁금증을 굳이 어려운 개념으로 공부하지 않고, 드라마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게 <파리의 연인>이 내게 남겨준 두 번째 빛나는 유산이었다.
다만 인생과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다시 돌려볼 수 있냐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해야 한다.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드라마처럼 인생을 N회차 관람할 수 있다. 사랑 또한 똑같다. 지나갔더라도 그 행복했던 순간들만 기억해낸다면 결말은 어쨌거나 상관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별이 오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을 안고도 사랑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알고 보니 일장춘몽의 행복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영원히 마음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이 모여서 더 찬란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