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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쩌다 올라왔을까.

by 안태현

서울 살이가 고달프다는 건 늘 알고 있었다. 근데 그건 누구나 다 버티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없이 어쩌다 서울에 와서 살게 됐고, 그 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느끼는 고달픔이란 말로 이루 할 수 없다. 혼자 서울 살이를 하는 감정은 혼자 서울 살이를 하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서울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처럼 어쩌다 서울에 와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여기에 나의 삶까지 얹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득바득 서울에서 살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 그러면서 포기해야 했던 것과 이뤄야 했던 것. 어떻게든 이 서울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에 대한 고달픔. 그리고 혼자 살고, 혼자 이뤄야 하는 외로움과의 싸움을 담았다. 내 서울 살이의 시작도 ‘어쩌다’였기에, 거창하지 않게 시작한다. 끝은 거창하려나. 그건 아직 내 서울 살이의 끝이 오지 않았기에 쉽게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서울 살이를 시작한 거니, 어쨌든 이 이야기도 시작해 본다.


EP.1-1 서울, 어쩌다 올라왔을까.


거창한 꿈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내 서울 살이의 시작은 ‘도피’에 가까웠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서 대구에 있는 학교에 가게 된 것도 ‘어쩌다’였다. 가고 싶었던 대학교의 연극영화과 입시는 다 떨어지고,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대학교의 연극영화과들만 합격한 상황에서 내게는 문예창작학과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평소 좋아하던 시인이 있는 학교였기에, 여기라면 ‘어쩌면’ 중학교 때부터 연극영화과 입시만 공부했던 것과 달리 새로운 걸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문예창작학과로 갔다. 그렇게 ‘어쩌다’ 간 것이니, 쉬운 일이란 없었다. 일단 입학은 했지만 당시에는 내가 배우고 싶었던 시나리오 부분이 그렇게 탄탄한 커리큘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시와 소설, 평론을 중심으로 배웠는데 그게 지금처럼 계속해서 글 쓰는 삶을 살게 한 시작이었다.


시와 에세이를 주 전공으로 해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영화에 대한 욕심은 끊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생활 동안 단편영화를 세 편 찍었고, 영화현장에 잡무를 담당하는 스태프로 참여하거나, 영화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어떻게든 영화와 멀어지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영화과 출신이 아닌 나에게 영화판의 현실은 가혹했다. 게다가 세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건, 내게는 충분한 돈과 재능이 없다는 거였다. 물론 센스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면과 장면을 어떻게 조합하면, 어떤 문법이 나오겠다는 건 책으로 배운 게 아니라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 내 감각이 터득한 거였다. 그래서 그 센스만 믿었다. 아니 재능이라고 착각한 센스만 믿은 것이리라.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번 모든 돈을 단편영화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장면에 대한 센스가 이야기를 만드는 ‘감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나를 계획형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어쩌다 문예창작학과에서 시 쓰는 걸 배우다 보니 시를 쓰게 됐고, 평론 쓰는 걸 배우다 보니 영화 평론을 짤막하게 쓰기도 했다. 이 평론들을 영화 커뮤니티에 게시하면서 그곳에서 몇몇의 인맥까지 쌓게 됐다. 그 인맥 중 한 명은 서울 살이를 시작할 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건 나중에 쓰겠다. 어쨌든 영화제에서 만났던 한 감독님의 소개로 한 단편 영화의 스태프로 참여하게 됐고, 그 속에서 만난 인연으로 또 다른 영화 현장에 잠깐 발을 들이밀기도 했다. 늘 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운과 센스를 믿고 영화에 대학생활과 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영화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가 느낀 건 난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센스만 믿고 아무런 노력도 똑바로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영화를 만드는 게 좋았지, 영화를 어떻게 잘 만들어야지라는 생각은 부족했던 게 당시의 나였다.


그렇게 빈손이 된 채로 영화를 포기하고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내게는 패배감과 좌절감만 남아있었다. 오랜 시간 사귀었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면서 내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너무 쪽팔렸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실상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영화를 두고 ‘어떻게 만들었어야 했다’라는 핀잔의 역할뿐이었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대구를 떠나고 싶었고, 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영화감독 지망생이라는 지독한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영화를 만들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역할’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온갖 영화 매거진에 이력서를 넣었다.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영화판에서 도망쳐 나온 내게는 그것도 사치였다. 그래서 눈을 돌리고 기자가 되어보자고 생각했다. 배운 게 글과 영화 밖에 없었다. 한 언론사에 이력서를 넣었고, 시험을 거친 뒤 덜컥 합격이 됐다. 2017년 6월, 졸업까지 한 달 남짓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취업이 되자, 나는 바로 대구에서 도망쳐 나왔다. 취업계를 쓰고 내게 패배감만 안겨준 곳을 떠나왔다. 그때 내 수중에 있는 돈은 1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일단 그래서 서울에 있던 친구 집에 얹혀 생활하기로 했다. 이때 등장하는 친구가 영화 커뮤니티에 짤막한 영화 글을 쓰면서 만난 이였다. 나와 같은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던 친구와 두 달 동안 동거 생활을 했다. 기자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던 때, 그 친구는 영화를 찍는 걸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퇴근 후에는 그 친구가 만드는 영화의 시나리오 쓰는 걸 도왔다. 어쩌면 그게 내가 그 친구집에 얹혀살면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빨리 집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른 이 염치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어쨌든 집을 구해야 하는 게 답이었다. 그럼 집을 구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내 수중에 있는 돈이란 첫 월급으로 받은 쥐꼬리만 한 돈밖에 없었다. 그때 당시 내가 받은 월급으로는 겨우 입에 풀칠하는 것도 면치 못하는 신세였다. 이걸로 보증금을 마련하려면 이 친구의 집에서 적어도 세 달은 더 얹혀살아야 했다. 그래서 일단 부모님께 염치를 접어두고 손을 벌렸다. ‘보증금 300만 원만 빌려주시라.’ 그렇게 말하고 나는 내가 살 집을 찾기 위해 부동산 매물 찾기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부동산 애플리케이션 속에는 휘황찬란한 매물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내게 있는 건 보증금 300만 원. 이 돈으로 일단 내 월급으로 버틸 수 있는 월세를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발품 밖에 답이 없었다. 이 매물을 찾아가는 여정이 내 서울 생활 고군분투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늘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운만 믿고 살았던 내 삶이 변하게 된 결정적인 과정이 이제 시작될 참이기도 했다.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매주 수요일, 일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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