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OO군 시절(1959년~)
그렇게 결혼해서 전라북도의 시댁에서 한 6개월 신접살림을 살았는데 그랬는데 7월에 이사가게 됐어. 남편은 강원도의 한 성당에서 일을 했잖아. 신부님이 편지를 보내셨는데 8월 15일이 피정이니 그 전에 아내가 와야 된다는 거야. 임신중이었는데 이사를 하게 됐지.
전라북도에서 강원도로 가는데. 하도 북쪽으로 계속 가서 이북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어. 그때 강원도길이 꼬부랑 길이고 길이 없어서 한 길이야. 무전으로 '이쪽 차 다 지났습니다' 하면 저쪽에서 오는 차가 가는거야. 옆에는 천길 낭떠러지고. 살아서 그 길을 간 게 신기할 일이야. 지금은 고속도로로 길이 잘 나있지만
할아버지가 하던 일은 강원도 한 작은 마을 공소 회장. 근처에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성당 예비자(입교하기 전에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신부님이 자전거를 하나 사주셨어. 성당에서 월급을 받았지. 3만원씩. 그때 3만원이면 쌀이 한가마니. 성당에 있으면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 사람들 다 밥을 먹여야 하니 힘들지. 군종신부님이 한 분 오셨고 밥해드리는 일을 하게 된 거야. 요샌 식복사라고 하지. 근데 반찬을 너무 잘 해주다 보니까 신부님이 나를 한달에 만원씩 주셨나 오천원씩 주셨나.
그때 수복지구고 그러니까 외국에서 구호물자가 막 와. 밀가루, 기름, 옥수수가루, 옷, 그런 것이 나오면 보따리 보따리 커다란 차가 들어올 때가 있었어. 신부님이 우리를 보고 교우들 적당히 나눠주라고 하셨어. 밀가루 같은 것도 교우들 퍼주고 그랬지. 양식이 궁할 때라 밀가루 반죽을 해가지고 튀김을 해서 애들 친구랑 간식을 해서 먹이고. 양재기가 있어서 양재기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반죽을 해. 이스트를 넣고 두다가 후끈한 김에 빵이 되는 거야. 그려면 애들 먹이면 그렇게 맛있다고 잘 먹고.
아이고 하여간 너네 할아버지는 참 나빠. 첫 아들 가졌을 때니까 60년대 초겠지. 아주 만삭이 돼서 아기를 낳으려고 할 때야. 애가 낳기전에 2주쯤 전이었어. 밤에 자려고 누워있는데 밖에서 누가 마루에 훌쩍 올라서는 소리가 나는거야 (공비예요?) 아니야 탈영병 이었을거야. 근데 너네 할아버지가 만삭인 나한테, 이렇게 배부른 사람한테 "밖에 한번 나가봐." 하는 거야 (아이고......(탄식))
"누구요!" 문을 활짝 열고 호롱불을 켜서 나갔어. 마루 밑에 있는 줄 알고 밑에도 보고 집을 한 바퀴 뱅 돌아도 아무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 대문있는 데를 보니 그때는 나무 제재소에서 베고 남은 갓 나무를 오늬같은 것도 박혀있는 나무를 가져다가 울타리를 해뒀는데. 가시처럼 둥글게 된 철사 있지? 그걸 해놨었거든. 그것이 팍 찌그러져 있네. 그 단단한 가시철망이 찌그러져 있더라고. 누가 왔다가기는 한거야. 도망가다가 거기 걸렸던 거지. (공비였을지도 몰라) 공비는 아니고 그때는 탈영병이 많을 때야.
첫째 자녀와 둘째 자녀의 출생, 성장(1959~1961)
첫째딸은 걸음마도 빨리 걷고. 다섯 살이나 됐을 때인가 외가에 데려갔는데 말을 똑똑하게 잘하는 거야. 여우같이 말도 잘 한다고 다들 그랬지. 2학년 때 웅변을 시키면 그렇게 잘 해. 내가 창가에서 듣고 있으면 아침 조회시간에 얘가 웅변하는 마이크 소리가 들려. 4학년 때 군내 대회에서 2등을 했지. 내가 원고를 써주고. 아유. 어떻게 그렇게 원고를 쓰고 그랬나 몰라. 한 가지 웃기는 것은 어디 심부름을 보내잖아? 지금은 애들 유괴같은게 없으니까 마음 편하게 심부름을 시키잖아? 그러면 마당에 거의 다 와가지고 동생을 업어. "엄마 내가 애기를 업고 왔어." 하면 칭찬을 해줬지. 대단한 장한 일을 한줄 알고 좋아하고. 똘똘했어. 나 없으면 동생들을 잘 살펴.
첫째 낳고 2년 있다 애기를 또 가졌는데 아들이야. 아침 7시에 낳았어. 너무 순해. 첫째가 동생을 그렇게 예뻐하는 거야. 어디 심부름 보내면 꼭 동생 데리고 가려고 하고. 심부름도 잘하고. 옷도 예쁘게 입히고 그랬지. 밥도 잘 못 먹고 코찔찔이여도. 원피스에 예쁘게 지어 입혀놓고 그랬어. 서울 애들처럼. 그래서 네 엄마 친구들은 지금도 내가 그때 OO군에서 치맛바람 날렸다고 한다며. 그런것도 아닌데.
1960년대 강원도 OO군에서의 생활
쌀 한가마니 만원. 한가마니를 사서 놓고 신학생들이고 손님 누가 오면, 다 먹이는거야. (OO군은 처녀때 고향인 OO에 비해 너무 작잖아요) 나는 교우들 교리 가르쳐 주고. 할머니들 모셔놓고 저녁기도 같이 하고 그런 것이 재밌더라고. 재미있게 살았어. 할머니들이 떡도 가져오고 콩도 가져오고. 회장님 댁이라고 좋아해주고. 다음에 갔더니 그 할머니들이 전부다 영세를 받았네. 선교라는 것이 그렇게 장하더라고.
1. 공소: 본당보다 작아 본당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며, 공소 교우들의 본당신부를 대리하는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형식의 공소예절이 행하여진다.
2. 구호물자: 한국전쟁 휴전 후 많은 이들이 천주교회로부터 정신적 물적인 지원을 받으러 귀의하게 되었다. 특히 이 때 천주교 각 본당들은 외국으로부터 원조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소의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속칭 '밀가루 신자'를 양산하게도 되었다. 1950년대의 한국교회의 신자증가율은 평균 16.5%였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143)
3. 탈영병: 자기가 속한 병영에서 무단으로 빠져나와 도망하거나 복귀하지 않는 병사. 군무를 기피할 목적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군무이탈죄 또는 무단이탈죄가 성립된다. 현지탈영(병영에서 도망치는 것) 미귀탈영(휴가, 외박, 외출 등에서 미복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고, 무기소지여부에 따라 무장탈영과 비무장 탈영으로 나뉘기도 한다. 1960년대 G이 거주하던 지역은 전방지역에 속해 군부대가 많았다.
[관련기사- 脫營兵(탈영병)이 强盜(강도) 亂行行脚(난행행각) (동아일보 1961.11.29.)]
한時間(시간)에 無慮(무려) 열번이나
井邑(정읍)경찰서에서는 二(이)七(칠)일 상오 탈영병 이OO씨를 강도 및 강간 혐의로 구속하였다. 그는 이날 새벽 四(사)시부터 五(오)시 사이에 정읍군 입암면 동천리 김영동씨 집외 열 집을 털어 현금 二(이)만 여환과 의류 시계 등을 절취한 후 같은 면에 사는 차(車)모씨를 뒷산에 끌고가 간음하고 행방을 감추었다가 범행 二(이)시간 반만에 경찰에 체포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