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는 죽어야 한다] : 예술로서의 치유

by 소울

줄거리 소개 [출처] 네이버 영화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 내 극장.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가 막을 내리고 무대는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찬다. 벅찬 감동으로 상기된 배우들은 살인, 폭력, 마약 등으로 복역 중인 실제 재소자들이다. 6개월 전. 교도소 교화 프로그램의 하나로 연극 <줄리어스 시저>의 오디션이 시작된다.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따낸 수감자들은 밤마다 연극에 대한 생각으로 설레기만 하다. 하지만 막상 시저 암살을 공모하는 상황을 연기하면서 수감자들은 과거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떠올리게 된다. 연극이 끝난 후.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왜 하필 죄수들이었을까


연극을 만들고 완성시키는 등장인물들이 왜 하필 교도소 안 죄수들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감옥 안에 있는 그들은 범죄자인 만큼 결핍도 많은 인물들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평온한 사람들이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어딘가 결핍되어 있고 망가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연극’은 어떤 행위였을까. 브르투스 역을 맡은 배우는 대사를 읊던 도중, 갑자기 멈추고 어떤 과거가 떠오른 듯 괴로워한다. 또한 시저 역을 맡은 배우는 데시우스에게 수년간 담아 온 이야기를 하며 그동안의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나는 연극이 죄수들에게 심리치료의 작용을 한다고 생각했다. 심리치료에는 생각보다 여러 방법이 있다. 상담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미술치료, 음악치료 같은 것들이 있다. 실제로, 연극치료를 준비하고 있다는 병원도 있었다. 연극으로 인해 그들은 무엇을 치료할 수 있었을까. 브루투스는 희곡 속 대사와 자신의 과거 상황을 대입시켰다. 시저는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을 드러냈다. 결국 모두 자신을 직면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희곡 속 상황과 대사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인물들을 동일시함으로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신을 본 것이다. 연극을 통해 그들은 불안정했던 자신을 위로하고, 더 나아가, 이상향을 설정하고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술이란 감옥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이 영화 속 최고의 대사라 꼽히는 문장이다. 그들은 연극 속 대사들을 통해 자유를 배우고, 무대 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그들은 무대에서 포효하듯 환호성을 지르는데, 바로 다음 장면이 바뀌어 그들은 작은 감옥 안에 들어간다. 시끄럽고 역동적이었던 전 장면과 달리 소리도, 대사도 없어 답답하면서도 매우 허무하게 느껴진다. 간신히 철장을 탈출하여 벌판을 뛰어다녔는데 다시 붙잡혀 철장에 들어간 기분과 같을 것이다. 자유를 주었다가 다시 뺏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예술과 ‘교화’가 비슷하다고 했다. 죄수들에게 종교가 가진 진리를 가르치고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교화인데, 나는 항상 그것이 죄수들에게 또 다른 형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도소 안에 가둬두고, 일을 시키면서 육체적인 고통을 가했다면, 교화는 정신적인 면에서 형벌을 주는 것이다. 범죄자들은 자신이 한 일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죄책감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큰 범죄를 저지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쁜 행동이라는 걸 머릿속으로 인지는 해도, 왜 그게 나쁜 건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종교를 할고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 죄수들은 엄청난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히틀러 밑에서 일한 여자가 감옥 안에서 글을 배우고, 세상을 깨우치게 되는데, 출소하자마자 그녀는 자살을 한다. 그것 역시 그녀가 자신의 죄를 인지하였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이 영화 속 죄수들에게도 연극이 교화와 같은 역할을 한건 아닐까 생각한다. ‘선’을 알고 나서 자신이 죄였음을 깨닫는 것과 같이, 자유를 알고 나서 자신이 감옥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시저는 몇 번이나 죽는다.


브루투스는 오직 ‘자유’를 위해 시저를 죽인다. 그렇다면 시저는 우리를 가두는 규율이나 규범으로 볼 수 있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죽인 뒤 이런 대사를 한다.


시저는 몇 번이나 오늘처럼 무대 위에서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어떤 문학 작품이 계속 사람들에게 읽히고,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 작품 속 문제가 아직도 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시저가 너무나 많고, 그 밑의 노예들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몇 번이나 죽는다는 명제 자체가 몇 번이나 살아난다는 말이 아닌가. 시저는 몇 번이나 살아나더라도, 우리는 몇 번이나 그를 죽여야 한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고통받는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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