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 창문 사이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온다.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건 옥탑방 바깥의 소음이 아니라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이다.
제일 높은 곳에 살고 있으니 커튼을 설치할 이유도 없었고 투명한 창문 사이로 보이는 밤과 낮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설치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옥탑방을 내려와 지하철로 향하는 길은 아침부터 항상 붐빈다.
성신여대생들의 등교 시간이기도 하고 주변 시장에 찬거리를 사기 위해 모이는 동네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늘 북적인다.
가끔 들리는 동네 빵집에서는 아침마다 식빵을 구워 내어놓는데 그 냄새가 정말 기가 막히게 좋았다.
역으로 내려가는 길 옆에는 늘 조그마한 트럭에서 토스트를 파는데 그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늘 우유와 함께 배 속을 채우고 사무실로 향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서울이지만 내가 사는 곳의 주변 풍경은 정겨운 시골 모습과도 비슷해 보여 언제나 좋았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늘 기분이 좋았다.
일찍 출근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사무실은 늘 내가 먼저 들어왔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신 과장과 함께 고민하던 운영 전략에 대한 방향이 거의 정리가 되어갔다.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제일 우선이었다.
마침 매주마다 열리는 생산 품질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산 공장의 김 기명 차장이 올라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신 과장과 함께 가벼운 커피 미팅을 시작했다.
늘 공장 기술자들의 의견만 전달하는 대변인 역할만 할 뿐 영업의 의견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똑같은 내용만 앵무새처럼 얘기하나 했더니 영업 실적 부진에 따른 생산 가동률 문제 때문에 공장에서도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었다.
야근도 하고 특근도 해야 수당이 많아지는 구조인 공장에서는 수입이 줄어드는 문제 때문에 공장의 기술자들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자체 회의 결과 영업의 요구 사항을 그동안 공장 생산의 특수성만 고집하면서 들어준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변화를 가져가기로 하였다고 한다.
소량 오더라도 소화할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는 준비를 다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신 과장과 나는 아주 좋은 기회라 판단하여 그동안 준비한 전략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1. 다품종 소량 생산에 대비한 원가 경쟁력 확보 방안은 있는가?
2. 동일 제품 생산 진행 시 원료 사용 비율에 대한 재검토는 가능한가?
3. 생산 라인 별 제품 관리는 가능한가?
우선 이 세 가지만 물어보았다.
이 질문은 공장에서 생산 원가를 낮추기 위한 활동을 해준다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영업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김 차장은 공장의 여기저기 부서에 전화를 걸어서 관련된 내용에 대한 확인 작업을 진행하였다.
신 과장과 내가 생각한 가장 좋은 전략은 생산원가를 낮추어서 확보되는 이익을 새로 진행하려는 거래선에게 돌려주는 방법이었다.
가격 경쟁력만 확보되면 등을 돌린 과거의 거래선들에게 다시 한번 다가설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전화로 통화를 하던 김 차장은 아주 밝은 표정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영업에서 요구한 내용을 실제로 현장에서 확인해 보니 적용가능한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고 소량 오더라도 공장 가동을 위해서는 무조건 진행하겠다는 의사 표시도 하였다.
당장 소득이 줄어드는 현실이 기술자들의 이기심을 누를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동안 비밀리 진행하던 해외 거래선 확보 프로젝트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제일 골치 아픈 문제였던 가격 경쟁력 확보작업이 의외로 생산 부서의 적극적인 협조로 쉽게 풀렸기 때문이었다.
신 과장의 도움을 받아 첫 해외 출장을 위한 준비작업이 무리 없이 풀려나갔다.
우선 여권부터 만들어야 했다.
졸업 전 어학연수 목적으로 만들었던 1년짜리 단수 여권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기에 해당 기간에 얼마든지 입출국이 가능한 복수여권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신청한 지 얼마 안 되어 10년 기간의 복수 여권이 내게 전달되었다.
역시 조직에 몸 담고 있으니 관공서 업무는 늘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청하였으면 오래 걸릴 일이었지만 회사에서의 출장 목적용 여권은 바로 나왔다.
관공서 분위기가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에는 적극적인 협조를 해주라는 높은 분의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제일 중요하고 힘든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었다.
바로 사장님에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부서의 책임자인 곽상무는 영업 실적을 위한 출장에 동의하였지만 사장님 결재를 앞두고는 조금 난감한 듯 보였다.
왜냐하면 전례가 없었던 신입사원의 해외 출장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선임 동반자 없이 단독으로 가야 하는 출장이라 반려될 확률이 높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결재가 반려되면 부서의 책임자가 생각 없이 일한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한 상황까지도 생각하는 듯했다.
신 과장이 나서서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곽 상무님. 이번 결재는 하워드랑 함께 들어가서 받으시는 건 어때요? 출장을 가려고 하는 직원의 얘기를 직접 들으시면 쉽게 결재를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곽상무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어차피 하워드의 입사 초기 소문은 들어서 알고 계실 테니까 직접 설명을 해드리면 좋은 결론이 나올 수도 있겠지.”
괜한 부담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안되면 말고 식의 프로젝트였는데 이제는 부서의 모든 직원에게 흥미가 생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신 과장은 그동안 준비한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면 좋은 결과가 생길 거라며 격려도 해주었다.
부서 직원들의 응원 목소리를 뒤로하고 곽상무와 나는 사장실로 올라갔다.
한참을 대기하다가 들어오라는 소리에 긴장되기 시작했다.
회장의 둘째 사위인 사장은 현재 그룹의 조그마한 계열회사를 책임지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룹 전체를 책임질 적임자라고 소문이 난 터라 더욱 긴장이 되었다.
곽상무도 사장 결재는 자주 받는 편이지만 이번 결재건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듯 보였다.
“어. 곽상무 혼자가 아니었네. 앉으세요.”
사장은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커피를 들여보내라 하였다.
본차이나 잔에 들어있는 커피는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다.
늘 사무실에서 타서 먹던 종이컵 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맛처럼 느껴졌다.
“사장님. 올해 들어온 신입사원 하워드… 아니 전 영문이라는 사원입니다. 이번에 영업 실적을 올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장님께 결재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직접 설명을 드리려고 함께 들어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해외 영업부 전 영문입니다.”
긴장이 되어서 인지 목소리가 좀 커졌다.
“오. 그래요? 한번 들어봅시다.”
준비한 자료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설명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는 모든 자료를 직접 볼펜으로 그리고 써서 만들었다.
저장을 할 수 없으니 만들다 실패하면 다시 만드는 게 다반사였다.
특히 사장 결재에 필요한 자료 준비는 더욱 시간과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설명을 드렸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에게 신입사원이 처음으로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일이라 긴장은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분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곽상무는 무슨 실수라도 할까 싶어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사장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생산 공장의 준비 내용과 그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 거래선과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대한 내용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구만. 사실 우리 같은 제조 업체의 가장 큰 고민이 품질과 가격 경쟁력에 대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국내 시장에 안주하는 영업 현실도 안타까웠던 적이 많았습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국내 시장보다 더 큰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 생각합니다. 한번 진행해 보세요.”
“네. 정말입니까?”
곽상무는 놀란 듯 물었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허튼소리 안 합니다. 하하하. 신입사원이 패기 있게 한번 도전해 보세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영문 씨는 서류 들고나가시고 곽 부장은 나랑 잠시 얘기 좀 합시다.”
신입사원 앞에서 흔쾌히 결재를 했지만 곽상무에게 싫은 소리라도 하는 듯하여 괜한 신경이 쓰였다.
비서실 앞에서 곽 부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오는 곽상무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곽 상무님. 괜찮으세요? 혹시 저 때문에 혼나신 거 아닌가 싶어서요?”
“아니야. 사장님께서 아주 만족해하셨어. 오랜만에 패기 있고 실력을 갖춘 신입사원이 들어온 것 같다고.. 우리 부서에 큰 기대를 해도 되겠다고 하시던데. 그리고 자네에 대한 소문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군. 지난번 대만하고 홍콩 업무 처리에 대한 내용 말이야. 열심히 잘해봐.. 하하하”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치면서 “기분도 좋은데 오늘 회식이나 하자고. 하하하”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최고 책임자에게 처음으로 직접 보고도 하고 어렵다는 해외 출장 결재도 받았으니 세상 다 얻은 듯 느껴졌다.
사무실로 들어오자 신 과장과 미스고는 이미 비서실에서 얘기를 들었는지 환한 웃음으로 반겨 주었다.
“호호호. 잘 해낼 줄 알았어요. 하워드가 대단하네요.”
“아닙니다. 상무님이 잘 설명을 드려서 결재를 쉽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머… 겸손도 하네요. 호호호.”
삽시간에 회사 전체에 소문이 돌았다.
곽 상무는 다른 부서장실을 다니며 커피 한잔 마시러 왔다는 핑계를 대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은근히 자랑을 하고 다녔다.
곽상무가 다녀간 부서의 몇몇 과장은 사람 알아볼 줄 모른다는 핀잔을 또 들었다고 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직은 늘 그런 분위기였다.
우리 부서만 잘되면 좋기 때문에 다른 부서의 불편함은 다들 관심이 없었다.
“자. 오늘 조금 일찍 나가서 다 같이 회식을 하도록 합시다. 사장님께서 오늘 보고에 대해서 기분이 좋으셨는지 회식 비용을 주셨어요. 즐겁게 먹도록 합시다.”
부서 전체가 환호를 질렀고 서둘러 책상 정리를 끝내고는 일찍 사무실을 나갔다. 부서 회식은 늘 신 과장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오늘은 회사 앞 작은 골목에 위치한 무쇠 돌판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근처 회사의 직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작은 백반 집이었지만 음식 맛의 내공은 상당한 집이었다.
신 과장의 선택에 아무도 이견이 없었고 들어서니 이미 회식 대형으로 식탁이 잘 차려져 있었다.
잘 익은 두툼한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걸치니 기분이 좋아졌다.
곽상무는 오늘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또 얘기하고 그랬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고 사장의 칭찬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묘한 경험도 한 하루였다.
직장 생활의 하루하루는 롤러코스터와 다름없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과정의 긴장감과 운행 중의 공포감 그리고 도착할 때의 안정감.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느낄 수 있으니 직장 생활 이야말로 최고의 놀이동산과 다를 바 없었다.